광해군, 얽힌 드라마 ‘화정’ 또 다른 역사진실 정명공주 그리고 인조 [사진/드라마 화정 영상 스틸]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3일 드라마 화정이 인기를 끌면서 당시의 역사에 대한 진실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네티즌들이 많다

이에 당시의 역사를 재조명해보면 칠서의 옥이 일어나고 몇 개월이 지난 1613년 7월 24일.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양사에서 영창대군의 처벌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고 되어 있다.

이때 영창대군은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신하들은 광해군을 죽이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광해군이 거절하고 살려두고 있다는 뜻이다.

이듬해인 1614년 1월 13일에는 ‘정항을 강화 부사로 삼다’라는 내용도 실록해 나온다.

그리고 2월 10일에 ‘강화 부사 정항이 영창대군 이의를 살해하다’라는 내용이 등장하면서 이어 “내가 덕이 없어 이 고아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하였으니, 비통하기 그지없다. 장례를 치르는 일과 제물을 올리는 일을 본관으로 하여금 각별히 살펴서 치르게 하라. 내가 마땅히 중사를 보내어 염하는 것을 살피도록 하겠다. 의의 장례를 대군의 예로 치르도록 하라.”고 하는 광해군의 전교가 기록돼 있다.

겉보기에는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살려두고자 애를 썼고, 또 죽고 나서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는 내용이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영창대군은 비참하게 죽었다. 강항이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아 영창대군의 기력을 뺐으며, 나중에는 아궁이에 불을 계속 때어 증살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광해군 일기는 인조가 집권하고 난 뒤 서인이 쓴 것이어서 의도적으로 광해군의 악정을 부풀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어찌되었든 영창대군이 비정상적으로 죽은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 책임은 집권자인 광해군에게 우선 있다. 심복이 마음대로 일을 처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두머리가 만만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만만하게 보여서 강항이 제 맘대로 영창대군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과 이이첨 사이에 말이 있었든지, 아니면 이이첨이 광해군의 속마음을 읽고 강항을 시켜 영창대군을 죽였든지 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라 휴식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궁궐 공사나 천도 문제 등으로 백성들을 고달프게 한 광해군이었다.

거기다가 거듭 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마저 죽게 했으므로 민심이 이반될 수밖에 없었다. 등 따스하고 배가 불러도 어린 영창대군의 죽음을 백성들이 슬퍼했을 터인데, 고단한 상태에서 그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남들의 마음도 이럴진대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왕후, 아니 지금은 인목대비의 마음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죽고, 친정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아들마저 죽었으니 인목대비에게 있어 광해군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 자체가 거북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하물며 같은 궁에서 살수가 있으랴?

당시 정궁은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에서 같이 지내기가 광해군은 광해군대로 인목대비는 인목대비대로 서로 지옥과 같았다. 이럴 경우 얼굴을 맞대지 않는 것이 서로에게 편한 법이다. 실질적으로 1613년 11월부터 인목대비와 딸 정명공주는 감금상태나 마찬가지 생활을 했다.

그리고 1615년에는 경운궁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옮겨가서 살았다기보다는 사실상 유폐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 정명공주의 나이는 13세였다. 아직 시집갈 나이가 아니지만 경운궁에서 오랫동안 유폐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혼기를 놓치게 된다.

웬만큼 걸림돌이 정리되었는데도 광해군과 이이첨은 멈출 줄 모른다. 신립의 조카인 신경희는 음보로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다.

그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으로 소명국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도 언제부턴가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원수처럼 지내게 되었다. 신경희가 분을 참지 못하고 소명국에게 ‘淫蒸父妾(음증부첩)’의 죄를 씌워 의금부에 가두어 치죄를 하려고 했다.

음증부첩은 아버지의 첩과 사통했다는 뜻이다. 삼강오륜의 윤리가 엄격한 시대라 큰 죄가 될 수 있었다. 완전한 날조였는지 실제로 소명국에게 그런 낌새가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무튼 생명에 위협을 느낀 소명국이 옥중에서 반격했다. 신경희가 정원군의 셋째 아들인 능창군을 추대하여 모반할 생각을 품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또 역모 사건이 터졌다. 언급했다시피 무고가 판명되면 소명국 자신이 반좌율로 처벌받게 된다. 그러나 소명국에게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이첨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물론 이이첨은 광해군과 통하고 있었고.

정원군은 선조가 총애하던 신성군의 동복동생이다.즉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것이다. 정원군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차례로 능양군, 능원군, 능창군이다. 장남인 능양군이 앞으로 왕이 되는 인조다. 막내인 능창군이 역모에 연루되었으므로 정원군과 세 아들에게 위기가 닥쳤다. 1615년 윤8월에 있었던 일이었다. 이때 능양군은 21세, 능원군은 18세, 능창군은 17세였다.
당시 광해군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능창군을 위리안치시켜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이유는 세간에서 능창군의 인망이 좋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정원군의 저택과 어머니 인빈의 무덤에 왕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불안과 의심을 품고 있던 차에, 때마침 고변이 들어오자 잘되었다 싶어 옥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보면 광해군의 심리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뭔가 모를 불안감과 초조감에 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사 당시 능양군은 백방으로 뛰어 다니며 막내 동생의 구명 운동을 벌였으나, 상대가 최고 권력자인 광해군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동생의 불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아버지 정원군과 더불어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왕기가 서린다는 저택을 나라에 바치고 이사를 했다.

광해군의 속마음을 읽어 낸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원군은 정신적인 불안을 이겨내지 못한다. 광해군의 감시가 계속 뻗쳐오자 그는 독한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1619년 겨울에 생을 마친다.

졸지에 막내 동생과 아버지를 잃은 능양군은 이를 갈았다. 능양군이 역모를 일으킬 마음을 먹기까지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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