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역사속에 재평가 받는 감춰진 병자호란 비밀은?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드라마 ‘화정’이 주목을 받으면서 역사속에 감춰진 인조의 일대기와 함께 병자호란의 뒤안길이 화제다.

이조시절의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 9일. 12만 8천여 청나라 대군이 다시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이 됐다.

조선을 향해 질풍처럼 내려온 그들은 불과 닷새 만에 도성을 점령하고,인조는 가까스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데...이렇게 해서 47일간의 고립. 병자호란의 비극은 시작됐다.

▲ 치열했던 남한산성의 싸움 기록화
항전이 길어지면서 성 안에는 모든 것이 부족해졌다. 성안의 사람과 짐승이 모두 굶주려 ‘말과 소가 서로의 꼬리를 뜯어먹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 매서운 추위로 군사들은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 못한 채 얼어 죽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처참한 나날들. 남한산성을 지원하기 위해 남하하던 근왕병들의 연이은 패전 소식이 날아들고, 조정에서는 화친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 가고 마침내 1637년 1월 17일. 직접 조선으로 출병한 청 황제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귀순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 와중에 조선 신료들은 명(明)에 대한 의리와 조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랑캐’ 청에 맞서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했던 ‘척화파(斥和派)’와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主和派)’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을 이어갔다.

당시 남한산성의 분위기는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급기야 인조와 조선 조정이 최후의 보루로 여겼던 강화도마저 함락됐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산성의 저항 분위기는 결정적으로 꺾이고 말았다.

인조는 결국 신복하라는 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산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로 가서 청 태종에서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병자호란의 배경은 정묘호란 후, 후금은 원나라 대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세력을 굴복시키며 중국대륙의 패권을 장악해 나간다.

▲ 치욕을 당하는 인조의 항복 모습 (남한산성 기록 동판 주조물)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기며 후금을 오랑캐로 취급한다. 1636년,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를 조문하기 위해 찾아온 후금의 사절단을 푸대접해 돌려보내는 사건까지 벌어지는데...

후금이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홍타이지가 황제로 즉위하는 그 날까지도 꼿꼿한 태도는 변하지 않았고, 급변하는 대외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조선의 외교는 결국 청의 분노를 사게 된다.

후금이 힘을 키워가는 동안 조선은 더욱 약해졌다. 인조정권이 무너진 국방과 피폐해진 민생을 바로잡는 대신 집중했던 것은 바로 원종 추숭.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인조는 '왕의 아들'이라는 정통성을 얻기 위해 아버지인 원종을 추숭하고자 했다.

그러나 명분과 종통의 의리를 중시하는 신하들의 반대로 10여 년간 논쟁이 이어졌던 것. 결국 1635년, 인조는 명의 승인을 얻어 원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서 숙원을 이룬 한국역사상 최고의 수모를 겪은 왕이 ‘화정’을 통해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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