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광종, 그는 누구? 폭군 혹은 성군 두 얼굴의 진실은?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17일 KBS '역사저널 그날‘ 시간에 방영되는 광종은 노비안검법, 과거제, 관복 제정 등 왕권 강화에 힘쓰며 혁신적인 개혁을 한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엇갈린다.

‘피의 군주’ ‘참소를 좋아한 광기의 왕’ 그는 누구인가? 500년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왕에게 왜 이런 꼬리표가 붙은 것일까? 7년의 기다림 끝에 개혁의 칼을 뽑은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이뤄져 눈길을 끈다.

형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 4대 왕이 된 광종(光宗). 당시 치열했던 후계싸움으로 왕실은 혼란스러웠고, 그 사이 호족들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졌다. 이에 광종은 호족의 힘을 인정하고 고개를 낮춘 채 때를 기다리는데...

956년 마침내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라는 개혁의 칼을 뽑아 든다! 양인이었다가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하게 한 제도지만 여기에는 호족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약화하려는 숨은 뜻이 있었다. 노비안검법은 호족세력과의 정면대결이자 고려 500년 기틀을 다지는 개혁의 신호탄이었다.

■ 광종의 개혁 파트너 쌍기(雙冀)

956년부터 왕권강화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중국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의 등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쌍기는 후주에서 왕권강화책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이를 광종에게 제시함으로써 고려사회에서도 왕권강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쌍기를 중용한 해에 노비안검법을 세운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개혁에 물꼬를 튼 광종은 노비안검법에 이어 과거제를 실시한다.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시험을 통해 관직을 얻을 수 있는 혁신적인 제도! 그런데 과거제 시행을 주도한 쌍기는 ‘고려사’기록에 따르면 광종은 쌍기를 특히 아껴 한림학사의 관직을 내리고, 집과 여자와 재물을 주는 등 파격적인 우대정책을 펼쳐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까지 했다

광종의 총애를 받으며 고려에 파란을 몰고 온 인물 쌍기(雙冀). 그가 고려에 귀화하게 된 사연은? ‘이광용이 만난 사람, 쌍기와의 대담’ 에서 그의 실체적인 진실이 밝혀진다.

■ 빛나거나 미치거나, 두 얼굴의 군주

이처럼 강화된 광종의 왕권강화책에 반발하거나 장애가 되는 호족세력에 대해 과감한 숙청을 단행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960년에 평농서사 권신(權信)이 대상(大相)준홍(俊弘), 좌승(佐丞)왕동(王同)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보고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광종은 즉시 이들을 귀양 보냈다.

꼬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 이후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기회를 얻어 충직하고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며 자식이 그 부모를 참소하는 행태가 벌어졌다고 하였다.

또한 감옥이 항상 가득차서 따로 가옥(假獄)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왕권안정에 대한 광종의 집념은 매우 강렬해 호족세력은 물론 골육(骨肉)과 친인척에 대한 경계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한번 의심이 가면 살육마저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 혜종과 정종의 아들마저도 비명에 죽어 갔다.

958년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와 독자적으로 육성한 시위군졸(侍衛軍卒)은 문무(文武) 양면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뒷받침하는 세력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기반을 배경으로 정적(政敵)들에 대한 과감한 숙청을 단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호족세력 등 정치적 적대세력들의 반발도 더욱 거세져 이에 대응할 수 있는 광범위한 세력기반의 구축이 필요해졌다.

963년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이곳에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해 각종 법회와 재회(齋會)를 개설하는 등 적극적인 불교정책을 펴나간 것은 이러한 필요성에서 나온 결과물들이었다.

즉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탄문(坦文) 등을 통해 호족세력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들을 포섭하고, 개혁을 지지해주는 사회적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2016년 4월 8일 일요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 광종, 개혁의 칼을 뽑다 편은 새로운 역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사진= KBS '역사저널 그날‘ 방송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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