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 일생의 최대실수 진관사 얽힌 대량원군 살해 실패 요동치는 역사의 물길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1일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천추태후의 일생 중 가장 큰 실패작인 ‘대량원군’ 살해 실패가 집중조명돼 새로운 역사의 물줄기가 조명되고 있다.

천추태후는 처음엔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이려 했으나 보는 눈이 많아 여의치 않자 조용한 산사를 찾았다.

그들의 눈에 띈건 진관(津寬)스님이 혼자서 수도하던 신혈사(神穴寺)였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신혈사로 옮겨 놓은 뒤 자객을 보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진관스님이 미리 굴을 파서 당시 열두 살이던 대량원군을 숨겨두어 자객은 실패했고, 대량원군은 화를 피할 수 있었다.

▲ 드라마에서 천추태후로 출연한 채시라와 그녀의 자객으로 부터 목숨을 구한 대량원군 (사진출처= kbs 천추태후 한장면)
정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의 장은 고려 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 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욱(郁: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랑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지만 이 역시 역사의 큰 줄기를 바꿀수는 없었다.

그뒤 3년 뒤 목종이 죽고 대랑원군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현종(顯宗)이다.

천추태후의 음모는 스님에 의해서 실패를 하고 후에 정부인 김치량과 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역시 비명에 살해를 당한다.

현종은 1011년 진관대사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삼각산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명명했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으로 여겨져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륙재(水陸齋)가 열리는 도량으로 봄 가을이면 큰 제사를 지냈다.

수륙재란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의식. 조상의 명복 뿐 아니라 나랏일을 하거나 나라를 지키다 죽었으나 제사 지내줄 사람도 없어 굶주린 영혼을 위해 해마다 두번 재를 올린 것이다.

​또 진관사의 역사는 세종대왕 때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선비들이 글을 읽던 곳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대량원군이 천추태후의 자객으로 부터 목숨을 구한 진관사 (최근 복원된 태웅전의 모습)
당시 세종대왕은 이 절에 독서당을 짓고, 우수한 인재들에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명했었다 한다.

만약 진관사가 옛 모습 그대로였다면 경내 어느 곳에 앉아 있으면 그 선비들의 글 읽던 소리가 조용한 산살에 울려펴졌을 턴데 6.25때 대부분 소실됐다가 1964년 이후 복원되고, 새 건물들이 계속 들어서는 바람에 고찰의 느낌이 많이 희석돼 좀 아쉽다.

한편 진관사에서 북한산 정상방향인 동쪽으로 이어진 진관사 계곡엔 경사가 급한 암반이 많고, 작은 폭포들도 이어지다 이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사모바위와 비봉에 이르게 되고 이어 향로봉과 승가봉도 가까이 있다

​진관사는 또 2009년 5월에 서울시 은평구 소재 진관사(津寬寺) 칠성각(七星閣) 해체 보수과정에서 내부 불단과 벽체 사이에 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 6종 21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신문류의 발행일자가 1919년 6월~12월 사이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동 자료는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진관사에서 활동하던 스님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며 확보한 자료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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