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군지 아세요? 상상을 초월하는 은막의 여신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1932년 영국 런던에서 미국인 부부의 둘째로 태어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 미국으로 돌아간게 그녀 영화 인생의 서막을 올리는 계기가 된다.

아버지는 미술상이었고 어머니는 뉴욕에서 배우로 활약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10살 때 영화 ‘귀로’(1942)로 데뷔한 뒤 ‘녹원의 천사’(1944)에서 귀여운 아역배우로 인기를 얻었다.

이어서 ;작은 아씨들‘(1949), ’신부의 아버지‘(1950) 등을 거친 그녀는 영화 ’젊은이의 양지‘(1951), ’자이언트‘(1956)에서 성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아역 출신 배우로서는 드물게 스타의 신전에 올라섰고, 당대 미인의 어떤 표본처럼 간주됐다.

유일하게 두번 결혼했던 리처드 버튼과 연기한 ‘클레오파트라’(1963)에서는 아예 미의 상징인 클레오파트라가 됐으며 테일러는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작비가 들어간 이 영화에서 역사상 최초로 100만달러의 개런티를 받기도 했다.

이후 테일러는 70년의 연기 생활 동안 50편이 넘는 영화를 찍었으며 두 번의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그녀가 콜걸로 연기한 ‘버터필드 8’(1960)으로 첫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거머쥐기도 했다.

또 영화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1966)는 그녀에게 두 번째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안겼고 이러한 그녀를 두고 감독 마이크 니콜스는 테일러를 “가장 위대한 여배우 중 한명으로 생각한다”며 항상 그녀의 팬이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당대 할리우드의 가장 위대한 연기파는 아니었다면서 종종 비평가들이 자신을 농담처럼 간주한다며 불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당대의 가장 화려하고 극적인 스타였다는 사실이며 스캔들과 7명의 남자와 8번의 결혼, 태작과 걸작을 넘나들며 스크린을 현혹한 그녀는 할리우드 그 자체였다.

이러한 그녀에게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기 시작한 40대 이후, 테일러는 알코올 의존증, 약물 중독 등으로 힘들어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적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1997년 그녀는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고 2009년에는 심장판막 수술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테이러는 “나는 늘 행운이 함께했다.”면서 “외모, 명예, 부, 사랑. 모든 것이 나와 함께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기도 했다.

말년에 테일러는 ‘엘리자베스 에이즈 재단’을 설립하고 에이즈 퇴치 활동을 벌이며 사회로 자신의 명성을 환원하기도 했다.

때문에 영화 팬들은 현재도 “테일러는 데보라 카의 기품, 오드리 헵번의 발랄함, 그레이스 켈리의 우아함, 마릴린 먼로의 관능미와는 다른 절대 미(美)의 배우였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세계의 영화계는 수많은 ‘세기의 미인’들이 있었지만 테일러만큼 그 어마어마한 명칭에 어울리는 배우는 드물었고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는 ‘테일러의 영화’는 세월흐름에 의해 막을 내렸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고전 할리우드라 불렸던 시대의 흔적도 사라졌고 배우 조앤 콜린스의 한마디가 “그녀는 할리우드의 마지막 아이콘이었다.”고 그녀의 죽음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저작권자 © 월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