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중아 '혼혈인 아닌 순수한 한국인' 여운의 목소리로 울고 웃으면 산 가요인생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21일 KBS ‘불후의 명곡’에서 ‘내게 사랑이 ~’로 잘 알려진 한국 록 밴드 인생을 살아오고 있는 ‘안개속의 두 그림자’의 사나이 가수 함중아 편이 방영, 관객과 시청자들을 70~80년대의 추역 속으로 빠지게 만들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음악가는 “아름다운 청춘! 뜨거운 열정! 그때 그 시절 가요계를 화려하게 수놓은 함중아의 명곡들이 새롭게 탄생 21일 탄생된다.”고 말했다.

7080 최고의 스타인 함중아는 묘한 매력을 지닌 목소리를 가진 가수 이며 가늘게 떨리는 여운의 목소리가 특징이다.

▲ 작사가 장경수와 평생의 동지인 가수 함중아(사진 좌측부터)
노래의 바탕은 락인데 소리는 트롯 같은...트롯을 비하한 말이라며 지금은 잘 안쓰는 말이지만 뽕짝과 락의 조화를 이룬 그의 가요계인생은 파란만장하다.

한편 함중아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혼령인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순수 한국인이다.

이러한 사연에 대해서 함중아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흰 피부와 이국적인 외모 때문에 종종 혼혈아로 오해를 받곤 했다”며 “가난했던 가정형편으로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 혼혈아들이 있는 고아원에 혼혈아인 척 들어가게 된 것이 오해의 시작이었다”고 밝혀 힘든 세월이 그를 혼혈인 아닌 혼혈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이 가요 인생은 고아원에서 생활하며 기타를 배우던 중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게 됐다. 이후 무작정 신중현을 찾아가 연습생 생활을 하다 1978년 ‘함중아와 양키스’로 데뷔했다. 당시 ‘함중아와 양키스’는 혼혈인 그룹이라는 파격적인 콘셉트와 독특한 음색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어 인기스타로 발돋움했다.

당시 국내는 1975년은 한국 록 음악사에서 암흑의 시기로 분류된다.

장발단속에 이어 연예계 전반에 불어 닥친 대마초 광풍에 직격탄을 맞은 수많은 그룹들이 해체 또는 잠적의 궤도에 올라서야 했다. 무대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렸고, 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2세대들의 가열찬 몸싸움이 물밑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함중아는 1974년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우승자 출신인 함중아는 1978년 ‘안개속에 두 사람’을 터뜨리면서 세상에 나왔다. 비슷한 시기에 윤수일이 등장했다. 함중아와 윤수일은 혼혈가수로 주목받으며 한국 그룹사운드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한편 함중아는 경북 포항에서 함중아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 어려서 형제가 뿔뿔이 흩어졌다. 함중아는 바로 윗형인 함정필과 함께 경기도 파주로 올라왔고, 전쟁고아와 혼혈아동을 돕는 펄벅재단에서 자랐다.

하루는 김영길이라는 또래의 친구가 재단을 찾아왔다. 영화 시나리오를 하나 썼는데 뮤지컬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세대들’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로 한국아이들과 혼혈아들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는 소년들은 신영균, 김지미 등 당대의 은막스타들을 찾아다니며 시나리오를 보여줬다. 물론 모두 ‘빠꾸’였다.

그러나 그애게 있어서 희망은 신중현 씨였다.

함중아 씨는 당시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이 신중현 씨였어요. 신촌 연세대 근처에 사무실이 있었지. 신중현 씨가 우리를 보더니 측은하기도 하고, 이국적으로 생긴 것이 특이하기도 하고 … 그래서 제자로 받아줬죠. 그때 우리가 한 10명 됐을 거예요.” 이렇게 함중아와 친구들은 2년가량을 신중현 밑에서 수련했다.

이러한 그에게 1974년 그룹쟁탈전 1등 ‘최고의 순간’이었다 1974년. 당시 유행하던 그룹사운드 경연대회가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렸다. 주간경향컵 그룹쟁탈전이란 대회였다. 여기서 1등을 ‘먹었다’. 지금까지도 함중아가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무대였다.

이어서 함중아와 윤수일이 등장하면서 국내에는 혼혈가수들의 왕성한 활동이 이어졌다. 희자매의 인순이가 있었고, ‘오, 진아’의 박일준도 가수로 데뷔했다. 언더그라운드에서는 혼혈 음악인들이 크게 늘었고, 대우와 시선이 달라졌다. 팀이고, 다른 한 팀이 ‘조용필과 그림자’였다. 공교롭게도 두 팀은 종로2가 웨스턴살롱에도 같이 출연했다.

함중아의 인생의 전반적인 내용은 한국 가요계의 전환기가 된 그의 음악성이 함께 어려있지만 무엇보다는 그의 음악성에 살이 숨쉬는 것은 예비군 헌련장에서 우연히 만난 작사가 장경수 씨의 영향력도 컸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금방 의기 투합이 이워졌고 함중아 히트곡 대부분을 함중아 작곡 장경수 작사로 이뤄지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현재도 두 사람은 영원한 동지로 가요계의 인생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가요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장경수 씨와의 인연은 함중아 씨에게 행운이었고 또 장경수 씨에게도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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