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과 얽힌 윤관 파평 윤씨가 한국사 명문가로 자리 잡은 유례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파평 윤씨의 가문에 전해오는 윤관은 여진족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강을 건널 때 잉어때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강을 건너게 도왔다는 설화가 있다. 윤관의 시조가 잉어가 변신한 미소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연관된 설화에 의해 파평 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

게다가 고려 때에는 조선과는 달리 무과 자체가 활성화되지 못 했고, 있어도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대신 무신들은 대대로 세습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파평 윤씨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냥 윤집형의 재능이 별로였을 수도 있다.

▲ 윤관 장군 초상화 (사진출처= 윤관 장군 사당 제공)
단적으로 당시는 혼인은 가문간의 결합인데 윤관의 어머니가 속한 가문을 보면 실제로 가문이 별볼일 없었는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애초에 소소한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가가 고려를 대표하는 명문가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게 윤관 이후의 일이다.

당장 윤관의 출생연도부터가 미상이다. 이 점을 볼때 윤집형 개인의 재능이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많이 간과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고려나 조선이나 혼인은 명문가의 여인과 그보다는 조금 가문의 격이 떨어지지만 능력있는 남성 간의 결합인 경우가 많았다.

즉 명문가에서 가문은 조금 쳐지지만 장래성 있어보이는 사위를 스카우트해서 밀어주는 셈이라고 보면 된다.

왕건이 외고조부, 경순왕이 외증조부인 후덜덜한 혈통이다. 만주에 위치한 여진족장인 '완안오아속'에 의해 여진족 통일 작업이 펼쳐지며 당시 여진은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을 주축으로 그들을 만주의 여진족들이 지원하는 양상이었다.

특히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은 죽기살기로 덤벼들었다 또한 여진 정벌에 참전한 사령관들은 부원수 오연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60대의 노인들이었는데, 그나마 오연총도 당시 50대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나이였다.

▲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는 윤관 장군 묘(사적 제323호) (사진출처 = 경기도 파주시 공보관실 제공)
윤관은 고려 중기의 문신·군인이다. 숙종, 예종 때 여진족 토벌에 출정하였다. 본관은 파평, 자는 동현(同玄)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뒤에 문숙으로 개시되었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 의 4대손으로 아버지 윤집형은 검교소부소감을 지냈으며 외가는 신라의 왕족이었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숙종 때 2차 여진족 토벌 당시는 원수로 출정하였으나 실패한 후 강화회담을 하고 되돌아왔다. 이후 특수 부대 별무반을 창설하여 오연총과 함께 병력을 훈련, 1107년(예종 2년) 3차 토벌 때 대원수에 임명되어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척준경, 왕자지, 오연총 등과 함께 17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진족을 토벌한 뒤, 북방에 9성을 쌓고, 여진족이 재침략하자 이를 진압하고 1108년(예종 3년) 개선하였다.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동북 9성을 공략하였으며 북방을 방비하는데 기여한 그의 업적은 현재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여진족의 동북9성 반환 요청이 있자 그는 반대하였으나 고려 조정은 화의론을 주장하여 9성을 되돌려주었고, 1109년 길주성에서의 패전을 이유로 한때 공신호를 박탈당하고 해임당하였으나 예종의 특별 배려로 복직하였다.

▲ 서울 중구 의주로2가에 있는 서소문공원에 있는 윤관 장군 동상 석조좌대 높이가 5.74m에, 동상은 6.26m인 육중한 모습이다. 윤관은 현재 서울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사진출처= 김진화 사진기자)
윤관 장군의 아들은 윤언이이고, 충혜왕의 장인 윤계종은 윤관의 7대손이었다. 남원 윤씨와 함안 윤씨 역시 그의 후손이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수태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군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다. 경기도 파주가 그의 고향이다.

고려 예종 때 여진을 함께 정벌한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술이 잘 빚어진 것을 본 윤관은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일 밤에 내린 소낙비로 물이 불어나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을 바라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 권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도 머리를 숙여 술잔을 받는 예를 표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 술잔을 주고받는 흉내를 내며 거나하게 마셨다. 이때부터 자식 사이의 혼인을 제안할 때는 '사돈 하자'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한다.

사돈의 뜻은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돈수(頓首)의 합성으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현재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인 점을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만년에 공신호를 삭탈당하고 불우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한 동정론도 현재에 인정을 받아 재 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한편 윤관 장군의 집안은 다섯 아들 중, 첫째 아들 윤언인의 후손에서 남원윤씨와 함안윤씨가 갈라졌고, 넷째 아들 윤언이의 가계에서 희비 윤씨, 정희왕후, 정현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숙빈 윤씨 등을 배출했다

그러나 윤관 장군의 말년은 당시 윤관 장군은 패군한 장수가 영구히 관직을 삭탈당하는 것과는 달리 예종의 특별 배려로 다시 복직하여 예종 5년(1110년) 복관되었고, 오히려 예종은 윤관에게 문하시랑평장사를 주고 가까이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윤관은 나이가 많고,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사직했고, 그 뒤 독서에 몰입하던 중 그 해 수태보 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 겸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임명되자 윤관은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하였으나 예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윤관이 다시 사퇴하려 하였으나 예종은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윤 장군은 1111년 향년 72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한편 윤관 장군은 서울 중구 서소문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 이 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위와 같은 장군 동상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윤관이다.

그런데 이 동상에 한자로 '문숙공 윤관 장군상'이라고 써 있어서인지 동상 주인공이 윤관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 그나마 동상 앞의 윤관 약력을 적은 석판도 국한혼용체로 써 있는 데다가 읽기도 불편하다. 그래서인지 이순신 장군 동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이 동상은 1979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저작권자 © 월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