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저널 그날] 다루지 않았던 문신정변 감춰진 망각의 3일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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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다루지 않았던 문신정변 감춰진 망각의 3일간 기록
  • 김복희 기자
  • 승인 2016.06.26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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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의종 때 무신들에 의해 일어난 정변 역사의 시간을 뒤빠꿔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26일 역사저널 그날은 고려시대의 피비린내의 서막을 올린 ‘무신정변’을 다루었다.

그러나 무신정변은 후에 역사적인 급변으로 인해 많은 내용이 정사와 야사가 달랐고 때문에 무신정변을 제대로 밝히기는 싶지가 않았다.

이에 본지는 역사속에 감춰진 무신정변의 야사를 다루어 보았다.

무신정변은 1170년(의종 24) 무신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해 일어난 정변으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으로 동요되고 있었던 고려 문벌귀족사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 고려사의 비극 무신정변(사진은 그라마 '무신시대'의 한장면)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고려 귀족사회의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고려 귀족사회는 귀족들이 정치적 권력을 독점하고 대토지를 겸병하는 등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는 가운데, 이를 둘러싼 지배층 내부의 항쟁이 야기되어 차츰 동요되어갔다.

문벌귀족들의 지배체제는 왕권과 결탁하려는 지방향리출신 신진관료의 성장을 제약했고 이는 다시 무반에 대한 차별로 연결되었다.

고려의 문·무반은 같은 양반관리로 단일 관계체계 안에 일원적으로 편성되어 법제적으로는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반만이 귀족이 되어 정치권력을 독차지하고 심지어 군대를 지휘·통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한 반면, 무반은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의 지위로 떨어져 있었다.

한편 일반군인들은 전쟁시는 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도 공역(工役)에 동원되는 등 고역에 시달렸으며 게다가 전시과 체제의 문란으로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해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문·무의 차별대우에 대한 무신들의 불만과 일반군인들의 불만이 고조되어가는 가운데, 의종의 반문신·반유교적인 경향과 그의 실정은 정변의 발생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1170년(의종 24) 8월 의종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계기로 정변이 일어났다.

의종은 보현원 행차 도중에 무신으로 하여금 오병수박(五兵手搏) 놀이를 하도록 시켰는데,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문신 한뇌(韓賴)가 그의 뺨을 때린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보현원에 도착하자 순검군을 모아 호종한 문관과 대소신하·환관들을 살해함으로써 반란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무신들은 개경으로 돌아와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고 하며 많은 문신들을 살해했다. 그 후 정중부 등은 왕마저 폐해 거제도로 유배하고 태자는 진도(珍島)로 내쫓는 한편, 왕의 아우 익양공 호(翼陽公晧)를 맞아 국왕으로 삼았는데 이가 곧 명종이다.

이 정변을 계기로 고려 문벌귀족 정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무신정권이 성립되어 그 후 1세기 동안이나 무신들에 의한 정치지배가 계속되었다. 이는 또한 고려 문벌귀족사회를 무너뜨리는 고려의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김복희 기자    bhkim@iworld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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