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배 (김포 금포교회 담임목사)

 

타이페이에서 진산행 버스를 타고 예류역에서 내려 마을 버스를 타면 20분 후에 예류에 도착한다. 예류는 만리향에 위치해 있고 북해안선 쪽으로 뻗은 좁고 긴 모습을 한 해갑(海岬)이다. 일천백만년 동안 침식 풍화작용이 교차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으로 그 모양 이름을 붙인 버섯바위, 촛대바위, 벌집바위, 생강바위, 호혈, 바둑판바위, 해식 동굴, 그리고 화석이다. 그 외에 여러 모양의 기암 괴석의 모양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여행객이 모여들고 있다. 예류를 둘러보다가 문득 독일 통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설치하고 국경선 검문을 강화했다. 1963년 서베를린 시장인 빌리브란트는 서베를린과 동독간 출입 증명서에 관한 합의서가 이루어지므로 동서독간 교류에 대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후 동독은 경제적 효과를 얻기 위해 서독 주민들의 방문을 대폭 허용했다. 1967년부터 1971년까지 1년에 200만명의 서독 주민이 동독 지역을 방문했는데 1년에 한 사람이 30일을 체류할 수 있었다.

빌리 브란트가 서독 총리로 재직하던 1972년에는 동서독간 통행에 관한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동독에 친척이 있는 사람 뿐 아니라 지인 관계만 되어도 방문이 가능해졌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년에 500만명에서 750만명이 동독 지역을 방문했다. 동독 역시 1963년부터 연금 수령자에 한하여 1년에 4주간 서독의 친인척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년에 100만명 정도가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다. 동독 주민은 서독을 통과할 때 엄청난 통과료를 요구했다. 실제로 1989년 한 해에 서독이 통과료로 지불한 돈은 5억 2500만마르크(약 4000억원)이었다.

동서독이 분단된 동안 우편 교류가 단절된 적은 없었다. 예를 들면 1965년에 3억 8000만건의 우편물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건너갔다. 동독이 우편 교류를 막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우편물 통과에 대한 댓가를 서독 정부가 지불했기 때문이다. 통일 직전인 1990년 한 해에 서독 정부가 동독에 지불한 우편물 통과료는 2000만 마르크였다.

1970년까지 동서독간 전화 회선은 수동식 34회선이었다. 1971년에는 284회선, 1979년에는 1061회선, 1988년에는 1529회선으로 늘어났다. 수동식 교환 방식도 반자동식 또는 자동식으로 발전되어갔다. 1987년 서독에서 동독으로 전화를 건 횟수가 3500여만 번, 1988년에는 4000여만 번이나 됐다.

1971년까지는 동독 주민이 서독 TV시청을 금지했다. 그러나 빌리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밀고 나간 이후부터는 동독 주민들이 서독 TV 시청을 묵인했다. 올림픽이나 분데스리가 축구가 열릴 때면 동·서베를린이 TV 안에서 통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결국 서독 TV가 독일 통일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민간 교류 확대와 거기에 해당되는 국고가 엄청나게 지불되었다. 바람과 물과 기상의 변화라는 댓가를 지불하고 예류가 되었듯이 긴 세월동안 서독의 투자와 인내가 통일을 만들었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남북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일정한 댓가가 지불되었다. 그 희생이 노무현 전대통령으로 인해 가속도가 붙었다. 독일의 경우와 비교하면 노 전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도 남북 신뢰 쌓기 수준으로 볼 수도 있다. 발언이 사실이어도 실현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통일 문제 만큼은 여야가 없어야 한다. 여당은 야당 죽이기 위해 노무현 전대통령의 통일 신뢰 쌓기 행로를 붉은 색깔로 물들이기 위해 온 당력을 쏟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새누리당은 통일을 생각하는 정당이 아니다. 민주당 역시 종북 세력과 확실히 담을 쌓지 않으면 통일 방해 세력으로 규정해도 무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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