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청 사무관에서 국무총리에서 죄인에서 다시 무죄를 받은 인고의 삶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27일 1심에서는 유죄를 받았지만 항소심에서 무죄를 받은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역경 끝에 희망을 찾은 파란만장한 삶이 27일 정가에 화제다.

이완구 전 총리는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3000만 원을 받은 혐의(정치자금법 위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 받았고 이어서 27일 열린 항소심에서 서울고등법원은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판사 이상주)는 "피고인에게 금품을 공여했다는 성 전 회장의 사망 전 인터뷰가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기 어렵다"라면서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1심과는 달리 고(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생전 마지막 육성이 담긴 녹음파일, 녹취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메모 등의 증거능력을 모두 인정하지 않은 것.

무죄 판결 직후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취재진들에게 "과도하고 무리한 검찰권 행사는 앞으로 자제돼야 한다"라면서 "이런 문제로 심려를 드려 국민들께 대단히 죄송하다, 깨끗하고 정직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수 있게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완구 전 총리는 국회에 입성하고 충남 도지사를 거쳐 국무총리에 오를 것으로 내다본 사람은 더 드물었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은 것에 대해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이유는 이 전 총리가 충남도지사 시절 큰 아들의 결혼식을 극비리에 올렸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부친·장인·장모 별세 때도 주변에 알리지 않았다. 축의금 부담감을 없애기 위해서 남의 돈을 받지 않은 청백리 같은 삶을 살아온 것 때문이다.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 전 총리는 운수사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학업 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2009년 한 인터뷰에서 “개구쟁이도,말썽꾸러기도 아닌 모범생이었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좌절도 있었다. 이 전 총리는 서울로 ‘유학’을 갔지만 경기고를 두 번 떨어지고 양천구 목동의 양정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쓴 맛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최고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그러나 좌절이 그의 승부욕을 꺾진 못했다. 이 전 총리는 당시 재수생 신분으로 사법행정예비시험에 합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서울대에도 두 차례 낙방했지만 성균관대에 입학한 그는 3학년 때인 1974년 제15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했다.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 김성진 전 해양수산부 장관, 김규복 전 생명보헙협회장 등이 그의 행시 동기들이다.

행시에 합격한 이 전 총리는 출생지인 충남 홍성에서 군청 수습사무관으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였다. 부인 이백연 여사와 결혼한 것도 이때쯤이다.

이듬해 현역으로 육군에 입대했으나 신체검사에서 1년짜리 보충역 소집 판정을 받아 귀향조치됐다. 평발 변형을 불러오는 ‘부주상골’ 때문이었지만 군면제에 따른 의혹은 청문회는 물론 그의 공직생활 내내 약점이 됐다.

이 전 총리는 이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거쳐 경찰로 전직한 뒤 1980년 경정 계급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국보위) 내무위원회로 파견됐다. 그는 그해 6월부터 10월까지 5개월간 하위직 실무 행정요원으로 일하며 새마을운동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이 전 총리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어느 날 문득 좀 더 액티브한 일이 나한테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경제기획원에서 경찰로 전직한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다.

이 전 총리는 이듬해 31살의 나이에 홍성경찰서장을 맡았고, 1980년대 중반 3년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외교관 생활도 했다. 이후 1990년대에는 충북 지방경찰청장과 충남 지방경찰청장을 지냈다. 이완구라는 이름이 일반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충청권에서 승승장구하던 이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눈에 띄었다. 그는 민자당 청양·홍성지구당위원장을 거쳐 1996년 신한국당으로 출마해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충남의 유일한 신한국당 의원이었던 그는 1997년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겨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승리하며 내리 2선을 했다. 2002년에는 대선을 앞두고 자민련을 탈당해 다시 한나라당으로 이적하면서 그는 ‘철새 정치인’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 즈음 이 전 총리에게 정치적 타격을 준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이적료 파문’이다. 그는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 지원금 명목으로 2억원의 불법자금을 받은 협의로 기소됐고 그 결과 17대 총선에 불출마했다.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07년이었다.

이러한 이 전 총리에게 위기는 또 한 번 찾아왔다. 그는 2012년 다발성골수종이라는 혈액암에 걸려 총선 불출마는 물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 그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고 당시의 투병생활을 기억했다.

그러나 그는 1년간의 항암치료 끝에 암을 이겨내고 2013년 부여·청양 재보궐선거에서 77.4%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19대 국회에 입성했다. 4년간의 정치적 공백을 일거에 해소하며 충청권의 ‘잠룡’으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3선인 이 전 총리는 2014년 5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에 선출됐고 세월호특별법 제정 등 여야 협상을 주도하면서 박 대통령이 흔들림 없이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든든한 지지대가 됐다. 그리고 2015년 1월23일 박 대통령으로부터 후임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그러나 국가의 일을 제대로 하기전에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그를 또 한번 위기로 몰아 넣었고 결백을 주장한 그를 야당에서는 비난 일색이었지만 그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국무총리 직도 버리고 법정 투쟁에 나섰다.

그의 진실은 항소심에서 밝혀졌고 이젠 그는 진정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위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으면 또 한번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진정한 그가 꿈 꿔온 대권을 향해 달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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