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성남시장의 형이 박사모의 지부장이 되면서, 그의 가족과 얽힌 눈물어린 애환의 이야기가 네티즌들의 관심이 뜨겁다.

현재 이재명 성남시장 대권후보 조사 명단에 이름을 올려 차기 대권의 주자로 국민들의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재명 시장이 주목을 받는 것은 그의 인생은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었기 때문에 그의 가슴 한켠에는 늘 ‘응어리’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재명 시장은 복지에 ‘미치고’, 불의에 ‘맞짱’ 뜬 그의 과거는 서민들의 애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자신이 즉 가난과 싸워 이겨낸 한국의 전형적인 ‘빈민’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주목받고 있다.

이재명 시장은 정치적 공세로 자신을 ‘공격’하는 논리에는 정면돌파하며, 결코 피하는 법이 없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경북 안동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1976년 초등학교를 마치고 성남의 상대원 시장 뒷골목 반지하 단칸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지독한 가난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고단한 어린 노동자 생활을 시작해 중학교도 진학 못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은 목걸이 공장이었다고 한다.

13살 꼬마노동자로 잔심부름을 하며 납땜질이 손에 익을 무렵 사장은 석 달치 월급을 떼먹고 야반도주하는 등 시련의 연속의 날을 보낸 어린노동자 ‘이재명’에게는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고 한다.

이재명은 성남 상대원 공단의 공장을 전전하며 기술을 배웠지만 돌아온 것은 수차례 산재 사고와 후유 장애와 싸웠으며, 작업 중 프레스에 왼쪽 손목이 끼어 골절상도 당했다고 한다.

결국 후유증으로 뼈의 성장판이 손상되는 장애도 입었으며, 지금도 팔이 제 기능을 못하는 6급 장애인이라고 한다.

장애인이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으면 공장 관리직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 하나로 주경야독을 시작, 그는 중·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마쳤으며, 이후 중앙대 법학과에 입학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화려한’ 판 검사 길을 포기하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노동 인권변호사로 ‘길거리’에 나서면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시민단체 활동도 참여했다고 한다.

혼자만의 외로운 길을 선택해,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다가 현실 정치에 뛰어 들었으나, 그는 “시민의 염원이 좌절되는 현실을 보면서 시민의 뜻에 반하는 정치를 바꾸고, 시민을 위한 정치를 직접 실현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후 그는 2010년 성남 시장에 당선됐고 2014년 재선에 성공해 현재 성남은 “살기좋은 도시 1위”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사실상 ‘파산’에 처해있는 성남시를 3년 6개월 만에 빚을 모두 청산하고 지금의 성남으로 거듭나게 해,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에도 탁월한 역량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또 이 시장은 무상교복 확대에 대해서는 "군인들에게 군복을 주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며 "학생들에게 주는 교복도 국가 의무로 더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복지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재명시장은 슬픈가족사로 인해 많은 안타까움을 사고 있으며, 온라인 과 페이스북에는 그의 가족사 전문과 형의 호소문이 공개되어 주목받고 있다.

 

 

<나의 슬픈 가족사..'이재명 형수 쌍욕'의 진실> [전문]

경북 안동 영양 봉화 접경인 심심산골 안동군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이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7남매를 데리고 산전을 일궈 살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집을 나가시고, 어머니 혼자 7남매를 키우셨지요.

어머니는 남의 밭일 대신해주고 겉보리 한 되 좁쌀 한 됫박씩 얻어먹으며, 사람이 굴러내릴 정도의 급경사 산비탈을 일군 산밭에서 키운 감자로 어린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자식들과 살아남기 위해 어머니는 감시원 눈을 피해 막걸리를 빚어 농사일이 끝난 밤에 술장사를 하셨고, 가끔 장에 나가 진통제 가스명수 같은 간단한 의약품을 떼어다 파는 약장사까지 하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어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힘겨운 삶을 사시면서, 늦은 밤 방구석이나

새벽의 부엌에서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우시던 어머니 모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방안의 물그릇이 꽁꽁 어는 '소개집'에서 자식들 추울까봐 새벽에 일어나 군불을 때주시던 어머니가 어느 날부터인가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까지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일찍부터 흰머리가 나신 어머니의 점점 희어져가는 머리카락만큼이나 점차 쭈그러져만 가는 어머니..

감기몸살이 나면 어머니는 약을 아끼려고 내게 '객귀물리기'를 시키셨지요.

어머니가 몸져 누우면 나는 으레 숫돌에 식칼을 간 후, 칼끝을 어머니 앞니 사이에 세우고 숫물을 칼날에 흘려 넣으며 어머니가 시킨 대로 '객귀야 물렀거라'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숫물을 여러 번 마신 어머니는 희한하게도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못쓰게 된 칫솔로 어머니 흰머리를 염색해드리고, 감자를 깎고, 어머니를 따라 돌이 굴러 내리는 깊고 깊은 산골짜기 밭에 가 비지땀 흘리며 콩밭 잡초를 뽑고 감자를 캐면서도 오직 어머니와 함께 다니는 게 즐겁기만 했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걸 버리는 어머니가 애처롭고 불쌍하고 고맙고, 어머니 없는 세상이 무서워 어머니 돌아가시면 나도 따라 죽겠노라 마음속으로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전부였습니다.

1976년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성남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반 지하 단칸방에 9식구가 오글거리며, 다시 결합한 아버지는 상대원시장 청소부로 일하시고,

어머니는 초등학생인 여동생을 데리고 시장화장실을 지키며 10원 20원 이용료를 받아 생활했습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화장실 앞에 앉아 남자손님에게 돈을 받는 걸 정말로 싫어하셨지만 그야말로 목구멍이 포도청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진학을 포기하고 전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살기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아버님은 청소부로 일하다 얻은 병으로 55세 짧은 생을 마감하셨고,

큰형님은 건설노동자로 일하다 한 쪽 다리가 잘리는 산재사고를 당했으며,

누님은 여전히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둘째 형님은 청소회사 직원으로,

동생 둘은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데 기가 막히게도 여동생은 2년 전 새벽청소를 나갔다가

과로로 화장실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분당에서 '야구르트 아줌마'이던 여동생은 딴 일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오빠가 시장 당선되었다고 좋은데 가느냐"는 말이 듣기 싫다며 야쿠르트 배달을 계속하다,

내가 재선된 후에야 그나마 좋은 직장이라고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2014. 8월에 저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최종학력이 제일 높은 사람이 중졸이었습니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겨우 마쳤고 나 역시 초등학교 졸업후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어머니는 학교 대신 공장을 가는 어린 내가 불쌍하다고 한손에는 도시락을 들고 한손은 내 손을 잡아 공장까지 바래주시곤 했습니다.

저를 공장까지 바래주고 돌아가시는 길에 눈에 미끄러져 낙상을 입어 고생하시던 어머니..

소년공으로 공장을 다니며 산재사고로 팔이 비틀어지고 후각을 잃는 장애인이 되었지만 군복을 입고 군기 잡는다며 출퇴근 때마다 '빳다'를 치는 관리자가 부러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사춘기의 장애소년으로 아침마다 교복입고 학교 가는 학생대열을 거슬러 기름때 묻은 작업복에 공장으로 향하는 제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습니다.

두 번의 자살시도가 실패한 후 죽을힘으로 살자며 목숨 걸고 공부해

장학금에 생활보조비까지 받으며 대학을 갔습니다.

가장 커트라인 높은 학과를 선택했고, 그래서 사법시험을 공부했고,

그후 인권변호사 시민운동가의 길을 걸어 마침내 여기까지 왔습니다.

대학에서 받는 공장노동자 월급의 몇 배에 이르는 생활보조비로 집의 생활비를 보태면서

정비공으로 일하던 셋째 이재선형님에게 공부를 권유했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내 장학금으로 공부한 형님도 좋은 성적으로 생활비를 받으며 대학을 갔고

공인회계사도 합격했습니다.

그때까지는 모두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셋째 형님이 결혼 후 서서히 가족들과 발길을 줄이고, 명절은 물론 어머니 생신 아버님 제사까지 불참하며 남이 되어갔습니다.

이 형님부부는 저에 대한 시기질투심, 열등감을 나타냈고, 이게 지나쳐 병적증상으로 변하더니

'내가 부처 예수보다 위대하다'며 이상행동을 시작했고,

형수는 이를 제지하지 않은 채 오히려 시댁과 형님 간의 갈등을 부추기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셋째 형님부부는 용서할 수 없는 패륜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성남시장후보직 양보를 바라던 이 형님은 불법문자메시지를 대량 발송하는 등

내 선거를 방해하다 2010년 내가 시장선거에 당선되자 취임식장에 청바지에 잠바를 입고 나타나

'가족특별석'을 만들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더니 취임직후부터 이권에 개입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녹지를 훼손해 노인요양시설을 짓는 이권사업에 셋째 형님이 돈을 받고 밀어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업신청이 네 곳이나 들어왔습니다.

큰일이다 싶어 이를 모두 불허하고 규정을 정비해 원천봉쇄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형님이 '시장친형'을 내세우며 공무원들에게 직접 업무지시를 하고

불응하면 폭언을 퍼붓고 직접 백화점 불법영업 단속에 나서는가 하면,

감사관과 비서실장을 통해 공무원 승진과 징계 등 인사청탁을 하고,

관내대학에 교수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이권청탁을 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이를 모두 묵살하고 공무원들에겐 통화와 접촉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습니다.

여기에 국정원 김과장이라는 자가 '이재명이 간첩이라 곧 구속된다'며 부추기고(통진당 사건으로 추측),

새누리당 고위간부가 시의원비례대표공천 언질을 주자 형님부부는 종북시장 퇴진운동을 본격 시작했습니다.

새누리당 의총장 난입, 은행 난동, 백화점 영업방해 등을 벌이던 형님은

급기야 어머니까지 폭행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패륜행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100억 부자라고 자랑하는 형님은 어머니가 가진 노후자금 5천만원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어머니에게 "그 돈 갖고 되져라. 되져도 상가 집 안간다"는 등 패륜적 폭언을 퍼붓고 완전히 인연을 끊었는데,

2012년 여름 근 10년 만에 어머니 집에 쳐들어가 "이재명에게 전화 연결하라"고 하다가

어머니가 거절하자 팔순의 늙은 홀어머니에게 'X할년 개X같은 년'이라며 '집에 불을 질러 죽인다'

'다니는 교회에 불 지른다'고 협박하여 어머니가 내게 전화하게 하여 통화를 하였고,

내 아내에게 형님은 '내가 나온 어머니 XX구멍을 칼로 쑤셔죽인다'고 하고

형수는 이걸 '고도의 철학적 표현'이라 극찬하며 시집식구들을 능욕했습니다.

형님부부를 피하시던 어머니가 주일에 교회에 가자 형님은 교회에 불지르겠다고 해

경찰이 어머니를 집에 모셔 보호하다 저녁에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머니 집에 난입해

기물을 때려 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해 입원시키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어머니 신고로 잡힌 셋째형님 부부가 경찰조사를 받고 나오던 중 이 끔찍한 패륜현장에 도착한 나는

도저히 이 부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형님과 통화를 시도했으니 형수가 중간에 빼앗아 '그 정도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느냐

어머니를 무고죄로 고소하겠다'고 하는가 하면 '시어머니 XX구멍을 찢어 죽인다는 건

철학적 비유'라며 약을 올려 심한 말다툼을 했습니다.

당신 아들이 당신에게 XX를 찢겠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겠느냐,

당신 오빠가 당신 친정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철학적 표현이라고 편들 수 있겠느냐

등의 말다툼이 수차례 있었습니다.

이 패륜의 현장에서 오간 수많은 통화중 일부가 왜곡 조작되어 2012년에 한번, 2014년에 다시 한번,

그리고 2016년 오늘 세번째 시중에 나돌고 있습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이제 병들고 늙은 내 가여운 어머니를 욕하고 능멸하고 때리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날 그들 부부가 내 눈앞에 있었다면 폭언이 아니라 살인을 했을 겁니다.

당시 함께 있던 둘째형님과 동생들이 오히려 내 정치적 미래를 걱정하며 말렸지만

내 정치적 미래가 어머니에 대한 패륜을 참아 넘길 정도로 중요치 않았습니다.

다시 어머니에 대한 흉포한 패륜현장을 직면한다면 과연 인내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형님은 결국 정신병증이 심해져 2014. 11. 약 6주간 형수와 딸에 의해

경남 창령의 국립부곡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형님부부는 '이재명이 시장권력을 이용해 멀쩡한 형님을 정신병자로 몰아 강제입원 시키려 한다'고

거짓말을 퍼트리고 형수 박인복의 거짓기자회견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 후

지금도 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폭행과 협박, 어머니 접근금지, 음성파일유포금지도 사실인데 부인하니

벌금판결, 접근금지명령서, 음성유포금지명령서를 공개합니다.

어머니를 둘러 싼 패륜과 가족간다툼, 정신질환자를 이용해 정치적 공격을 사주하고 부추기는 국정원,

이 패륜을 사주하고서 오히려 나를 패륜으로 모는 패륜 새누리당에 언젠가 꼭 책임을 묻겠습니다.

혈연이라 어쩌지도 못하는 이 고통..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원만하게 형님부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면 이런 사단은 피했겠지만,

형님부부는 친인척비리범이 되어 저를 더 괴롭혔을 겁니다.

오늘도 모 시장실이 동생비리로 압수수색 당했다는 보도를 보며

가족문제로 인한 고통이 친인척비리보다는 낫다는 위안을 삼습니다.

공개되지 말아야할 가족문제가 공개되어 세인들이 눈 흘기는 사이 돌멩이는 커지고 또 단단해지고 있습니다.

회피할 수도 있는 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바로 불공평과 불공정을 시정하고 기회균등한 나라를 만들어

내 가족 내 이웃 나아가 대한민국 90%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100만 도시 성남시장 가족으로 가능할 수도 있는 혜택이나 이익을 바라지 않고

가난한 서민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가족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표합니다.

어머니..주신 사랑과 희생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꼭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주십시오.

어머니 사랑합니다.

 

 

 

<호소문 전문>

이재명시장 가족문제 더 이상 정치악용 말아주세요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이재명 성남시장 후보의 가족들입니다.

저는 5남 2녀인 7남매중 둘째인 이재영입니다.

너무 마음 아프고 불편한 일이라 글을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들의 이야기를 제가 대신해서 쓰면서 저희들의 간절한 마음을 모아 호소 드리려고 합니다.

​저희들 또래의 어린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참 가난하고 힘들었습니다.

어머니 혼자 7남매나 되는 대식구를 산전을 일구고 막걸리 장사까지 해가며 키워 주셨고 아버지는 일찍 여의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우리 형제들은 예외없이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일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넷째 이재명 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이 작아 언제나 집안에 걱정거리였는데,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넷째는 공장에 다니면서도 공부욕심이 많아 공장일이 끝난 후 독서실에서 밤새워 공부하고, 아홉 식구가 쪽잠을 자는 단칸방 구석에서 혼자 5촉짜리 백열등을 켜고 공부를 하더니 제 힘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갔습니다.

아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그때 프레스 사고로 산업재해를 당해 지금도 왼쪽 팔이 휘어 있습니다.

가족들은 네째를 볼 때 언제나 얼굴보다 그 왼 팔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넷째가 장학생으로 대학에 합격했을 때는 모처럼 가족들이 둘러 앉아 또 얼마나 웃고 떠들었던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냥 장학생이 아니고 생활비까지 지원받는 장학생이었습니다.

넷째가 장학금으로 셋째 재선이를 공부시켜 셋째도 대학생을 거쳐 결국 회계사가 되었습니다.

그랬던 가족들이었습니다.

풍족한 생활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형편이 오히려 가족들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지금도 별로 욕심이 없습니다.

청소부와 간병인 일을 하고, 공장을 다니고, 건설공사장 막일을 하고 있지만 만족하며 넷째 동생이 시장 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도록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서부터 갑자기 셋째가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주기적으로 이상한 행동을 하였고, 심지어 자신을 예수나 부처보다 위대하다며 아무에게나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조울증과 정신질환증세를 보여 정신과 약물치료도 받았습니다.

​넷째가 시장이 된 후 셋째가 이런 저런 청탁을 하였는데 동생시장이 단호하게 거절하고 아예 전화를 받지 않자, 셋째는 돈을 안 준다는 이유로 차마 입에 못 담을 폭언을 하고 십년 가까이 인연을 끊었던 어머니를 2012년에 갑자기 찾아가 ‘동생에게 전화연결 하라’며 집과 교회에 불을 질러 죽인다고 협박을 해 하는 수 없이 전화연결을 해 주었다가 형제간에 심하게 싸운 일이 있습니다.

셋째는 국정원 직원을 만나고 또 국정원에 갔다 왔다며 넷째가 간첩이라 곧 국정원에 구속될 거 라는등 이상한 말을 하며 종북간첩시장 퇴진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셋째부부는 결국 어머니께 자식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 될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말로 살해협박을 하고 그 처는 이에 동조하여 ‘살해협박’을 한 셋째의 폭언을 ‘철학적 표현’이라고 두둔하며 어머니와 가족들을 능멸했습니다.

​겁이 난 어머니께서 법원에 신청하여 100미터 접근금지명령을 받았고 경찰에도 신변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셋째는 어머니가 계신 교회에 불을 지른다고 위협하여 경찰보호를 받으며 집으로 들어왔는데, 경찰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셋째부부가 어머니 집에 쳐들어 가 살림을 부수고 어머니를 폭행해 다치게 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어머니는 가족문제지만 너무나 두려워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셋째가 구속된다고 하여 선처를 호소해 벌금 500만원으로 무마되었습니다.

​7남매 키우시느라 당신의 청춘 다 보내시고 안해 본 일 없으신 어머니입니다.

그 고생 때문에 이제 다리가 불편해 제대로 걷지도 못 하는 가여운 어머니입니다.

 

세째부부의 패륜적 협박과 폭행 때문에 가족들간 심한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어머니가 안쓰러워하고 귀여워했던 넷째이고 또 어머니를 끔찍이 여기는 넷째였습니다.

잘못된 일이라 생각이 들면 참지 않는 성정의 넷째도 시장이라는 체면을 잊은 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셋째부부의 패륜행위 때문에 셋째 부부와 형제들 간 심한 말다툼이 여러차례 있었고 셋째부부가 말다툼을 녹음해 일부만 편집 왜곡해서 새누리당측 인사들과 함께공개해서 넷째를 몹쓸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집안일이라 해명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는 넷째, 아무리 시장이라지만 얼마나 억울하고 가슴 아프겠습니까?

​결혼 후 이상하게 변한 셋째 때문에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의사소견서를 받아 연명으로 성남시 보건소에 진단을 신청한 일이 있습니다.

강제입원이 아니라 진단을 해서 정신과치료가 필요하다는 것을 셋째며느리에게 알려 치료를 받게 하려고 했습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상태가 점점 나빠져 나중에는 자살 등 심각한 상태가 올 수 있다는 정신과전문의의 의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셋째는 진단을 받지 않으려고 ‘시장인 넷째가 강제입원시켜 나를 죽이려 한다’고 난리를 쳐 시장인 동생의 입장이 난처해지자 넷째가 고민 끝에 못하게 해서 진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밝히기 힘들었던 저희 아픈 가족사의 전부입니다.

​변호사로도 잘 나가던 넷째가 성남시장선거에 나선다고 했을 때 마음속으로 많이 걱정했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서운지 귀동냥으로나마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힘들게 당선이 되었고, 그 후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꿋꿋하게 일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동생이지만 존경스럽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번씩 어머니 모시고 형제간에 밥이라도 먹을라치면 몇 숟갈 뜨다 말고 전화받으며 나가는 동생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동생인데, 가족이나 주변을 챙기지 않고 너무 일만 해서 오히려 섭섭하기까지 한 동생인데 어떻게 재명이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답답할 뿐입니다.

​국정원에 출입하며 동생을 간첩으로 몰고, 새누리당 공천받아 성남시의회 의장이 되겠다며 새누리당 의원들과 어울려 종북시장 퇴진운동에 패륜행위까지 하는 셋째 부부도 문제지만 마음의 병을 악용하여 가족불화를 만들고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그들의 철면피함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정치가 무엇이라고 이렇게 한 가족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까? 가만히 놔둬도 그 기억 때문에 팔순 노모는 가끔씩 먼 하늘 보며 눈물 흘리십니다.

주무시다 갑자기 놀라서 벌떡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 가족에게는 힘들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동안 조용히 있으려고 했습니다.

가족 간의 불화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두려워 죄인처럼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앞에 나서서 재명이가 처한 어려움에 도움이 되고 싶기도 했지만, 그것도 오해를 받을까봐 참고 참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에게 있을 수 없는 패륜행위를 저지른 셋째의 처까지 불러내 또다시 그 일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부모에게 패륜한 가족과 다툰 넷째를 패륜으로 몰기 전에 패륜한 셋째부부와 이를 조장하고 악용한 정치세력과 국가가 더 나쁜 패륜 아닌가요?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저희 가족 일을 더 이상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하지 말아주십시오.

권력이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해야겠습니까? 팔순 노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그 손가락이 다 문드러지는 아픔을 겪고 있고 우리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더 이상 저희 가족문제를 정치에 악용하지 말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14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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