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가이며,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쓴 이육사에 대한 관심이커지면서, 그의 프로필과 집안내력등이 주목받고 있다.

이육사의 본명은 '원록'이며, 아호인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의 본관은 진보(眞寶). 본명은 원록(源祿). 자는 태경. 이명은 원삼(源三)이었으나 뒤에 활(活)로 바꾸었으며, 이황(李滉)의 14대손으로 아버지 가호와 어머니 허길(許吉) 사이의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예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대구 교남학교에 잠시 다녔고, 1921년 안일양과 결혼한 뒤 1925년 형 원기(源琪), 동생 원유(源裕)와 함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했다.

1926년 잠시 귀국해 일제에 억압받는 민족현실을 괴로워하다가 중국으로 가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7년 국내에 들어왔다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이후 10여 차례 투옥되었다가 1929년 출옥하자마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적을 두고 만주와 중국을 돌아다니며 독립투쟁을 벌이면서 항일운동을 이어 나간다.

이 후, 1933년 귀국해 언론기관에 근무하면서 '육사'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했으며, 1937년에는 신석초·윤곤강·김광균 등과 시동인지 〈자오선〉을 펴냈다.

1943년 4월 서울에서 검거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이듬해 건강이 악화되어 베이징 감옥에서 슬픔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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