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아 ‘트로이카 시대’ 그들과 경쟁한 여배우 삶과 운명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김기덕 감독의 ‘남과 북’(1964)을 보면, 여주인공의 극중 이름이 '고은아'다.

그 영화 속의 이름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965년 ‘란의 비가’(감독 정진우)라는 영화를 통해 고은아라는 이름의 여배우가 데뷔한다. 연골육종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여주인공역을 맡은 고은아는 이 영화의 성공으로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렸고,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이끄는 여배우 중 하나로 성장한다.

이어 당시 맹활약했던 명감독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1965)로 스타덤에 오르는데, 영화 ‘갯마을’은 한국영화사 걸작 중의 한편이자, 소설보다 영화의 우월성을 자랑한 작품으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다.

극장 사장으로 변신한 고은아 씨의 삶은 평생을 불우한 이웃과 함쎄 사는 헌신의 삶이다.(사진 월드투데이 DB)

한국적인 서정으로 한폭의 수채화처럼 그린 어촌의 풍경과 여인들의 인생유전을 다룬 이 영화는 스페인 국제해양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작품으로 작품적으로나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또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 문예영화 붐이 일어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단 한번이라는 단서 아래 출연했지만, ‘난의 비가’와 ‘갯마을’의 성공하면서 고은아는 김지미를 위협하는 여주인공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그 시기 윤정희, 남정임, 문희 등 트로이카 여배우들이 등장하면서 고은아는 이진으로 밀린다.

‘고은아의 황금기’는 그렇게 짧았다. 1967년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과 결혼하는 바람에 자사제작의 영화에는 꾸준히 출연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고은아는 트로이카 시대에도 살아남아 그들과 경쟁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고은아는 ‘홍의장군’(1973)이나 ‘연화’(1974) 등의 사극에서 정숙한 부인을 소화했고 정진우 감독의 ‘율곡과 신사임당’(1978)에서는 신사임당 역을 맡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청등홍등’(1967), ‘장안명기 오백화’(1973) 등에서는 기생역으로도 열연했다. 1946년 부산에서 출생한 고은아는 부산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미대 재학중에 배우가 되었다.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의 끈질긴 구애로 1967년 결혼했다.

1970년대 들어서는 TV에서도 활동을 했으며, 드라마 ‘파초의 꿈’(1970)이나 ‘달래’(1973) 등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작품도 많았는데, ‘사모곡’(1972)에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로 분한 연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은아는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기독교 방송국의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서울극장, 부산의 대영시네마 등 극장을 운영하는 사업가로서도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평생을 해로했던 부군 곽정환 사장은 2013년 타계했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60,70년대 척박했던 문화적 토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해온 한국의 중견 영화배우들이 깊이 있는 배우론 하나 없이 잊혀져가고 있다. 우리문화와 영화계의 밑거름이 되었던 중견배우. ‘정숙미와 관능미’ 라는 묘한 이미지로 한국 영화사에 강한 발자취를 남긴 여배우거 고은아이다.

그녀는 배우가 된다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다. 청초한 여대생이었을 때, 미술대에서 공예가를 꿈꿨다. 어느 날 한 조각가의 화실에서 친구들을 위해 우연히 모델을 했다. 며칠 후 낯선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왔다. 영화 한편 찍자고 했다. 거절했다. 막무가내였다. 결국 영화사 사무실까지 끌려갔다. 사진 한 컷 만 찍으면 된단다. 얼떨결에 응했다. 이후 인생의 방향이 확 달라졌다. 여대생 본명 ‘이경희’에서 영화배우 예명 ‘고은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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