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한국대중음악의 태동(해방이전)

한국음반산업협회에서 "기록으로보는 시대별 한국대중음악사"를 소개했다.

한국음반산업협회에서"오늘날 한국의 대중음악사에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대중음악사에 대한 음악산업계 및 관련단체의 역사자료가 양적으로 많지 않으며, 질적으로도 높지 않다는 않다는 점이다. 연구·조사 기능이 활성화된 서양이나 일본 등 이른바 ‘선진국’의 음악산업계와는 크게 다르다. 즉, 업계와 학계 사이의 소통은 한국에서는 그동안 잘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한국대중음악사의 시초부터 2010년대 K-POP까지 정리하는 칼럼을 게재하고자 한다."며 전했다.

한국대중음악 역사의 출발은 19세기말로 시작된다. 노래를 기록, 재생하는 축음기가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인 것은 고종 24년 1887년 알렌(N. H. Allen)에 의해서이며,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를 기준으로 우리말로 녹음된 최초의 음반은 1894년 7월 24일, 미국에서 안종식, 이희철, 양손에 의해 녹음된 ‘아리랑’ 등으로 원통형 실린더 음반이 현재 미국의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레코드로 취입된 첫 창작곡은 1925년 11월 ‘닙보노흥‘ 라벨로 발매된 성악가 안기영이 부른 ‘내 고향을 리별하고’를 꼽는다. 이어 12월에 권번출신가수 박채선, 이류색의 목소리로 ‘이 풍진 세월’ 등이 발매되는데 이 음반들은 일축축음기 동경지부장을 겸하고 있던 이세기가 종로에 조선축음기상사를 차린 뒤 일본에 가서 취입한 것이다.

1926년 8월, 소프라노가수 윤심덕이 ‘사의 찬미’와 ‘부활의 깃붐’ 등을 닛토오레코드에서 취입한 후 귀국길에 현해탄에서 투신해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27년에는 경성방송국이 개국하면서 이전까지 없었던 라디오방송이라는 새로운 음악매체가 등장했다. 이때 라디오의 총 등록대수는 1440대로, 한국인은 275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8년부터는 대중음악이 확실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수 채규엽의 데뷔곡인 ‘봄 노래를 부르자’는 완전한 창작곡이라는 점에서, 음반을 통해 비로소 발표되고,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한국대중음악사의 진정한 첫 작품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다.

1930년대는 대중음악이 본격적으로 꽃 피웠던 시기다. 이때를 전후해 ‘노들강변’, ‘처녀총각’ 등 ‘시민요’가 등장하는데 전래민요와 다른 점은 작사, 작곡자가 분명한, 우리가락을 기초로 한 형식의 노래라는 점이다. 30년대에는 빅터, 태평, 콜롬비아, 포리돌 등 레코드사들과 함께 한국인 이철이 경영하던 ‘오케’가 있었다. 각 음반사들은 음반 홍보수단으로 직영 악극단을 운영했고 신인가수를 선발하기 위한 콩쿠르를 개최했다. 37년부터 방송에서 ‘유행가’라는 용어 대신 ‘가요곡’이라 사용했고 레코드산업이 호황을 누렸지만 서울에 녹음실을 설치한 곳은 37년 오케레코드사 뿐이었다. 이시기에 발매된 음반 라벨에는 노래의 장르를 다양하게 분류해 놓고 있는데, 이중에서 유행가, 유행소곡, 유행곡, 서정소곡, 애정소곡, 영화주제가, 가요곡, 신가요, 만요 등이 오늘날 민요, 가곡, 동요 등과 같이 세분화된 ‘대중음악’의 범주에 드는 것들이다.

1940년대 1941년 조선연극협회와 연예협회가 통합, 조선연극문화협회가 창설되고 연예인들에게는 ‘기예증’이 발급되었다. 41년 ‘라미라가극단’이 ‘견우와 직녀’를 초연, 이것이 우리나라 뮤지컬의 효시로 본다. 43년부터 45년까지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음반제작이 중단되고 오로지 군국가요만이 울려 퍼졌다.

한편 사단법인 한국음반산업협회는 한국음악데이터센터(KMDC) 사업의 일환으로 디지털 음악산업 환경에 필요한 음악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 분류하여 앨범 및 음원의 표준메타데이터 정보를 구축 산업계, 및 학계, 일반인들에게 음악정보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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