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영화을 되찾고 싶은 고찰 "개태사"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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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화을 되찾고 싶은 고찰 "개태사"를 가다
  • 주상호 기자
  • 승인 2019.10.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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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개태사

대전에서 계룡시를 지나 논산시로 들어서는 연산면 1번 국도로 가다 보면 옆모습이 중후하게 뻗은 산자락을 옆으로 하고 달리게 되는데 그것이 개태사가 진산으로 삼고 있는 천호산이다. 길에서 바로 옆으로 개태사로 들어가는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으니 개태사는 여느 절과는 달리 비교적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논산 8경 중 제6경인 개태사는 고려를 건국한 왕건이 창건한 고려의 왕실 사찰이다. 오랜 세월 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재건된 사찰인 만큼 옛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귀중한 유물과 불사로 이루어낸 천년고찰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사찰이다.

바로 계백의 결사대가 신라군을 맞아 대적했던 곳이며 신라 하대까지 황산벌이었으나 지금은 연산면 천호리인 이곳에 자리잡은 개태사는 그 창건에 남다른 배경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쫓아 황산 숯고개를 넘어 마성에 진을 치고 신검의 항복을 받아 낸 것은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적인 일이었으니 이를 기념하여 바로 그해인 936년에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국통일은 하늘이 도와주심이라 하여 황산의 이름조차 천호산이라고 고쳤다.

『고려사절요』에는 “개태사를 지을 때 사치스러운 것이 극도에 이르고······12개월에 개태사가 완성되니 낙성법회를 베풀고 왕이 친히 소를 지었다”고 되어 있어 고려의 호국대찰로서의 면모가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생민(生民)들이 백가지 근심을 만나니, 많은 고통을 이겨 낼 수 없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발원문에서 왕건은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기를 ‘큰 간악한 무리를 섬멸 평정하여 생민을 도탄에서 건져, 농사와 길쌈을 제 고장에서 임의로 할 수 있게 하겠나이다’ 하였더니······병신년 가을 9월에 숭선성 가에서 (후)백제의 군사와 대진하여, 한번 부르짖으니 흉광의 무리가 와해되었고, 두번째 북을 울리니 역당이 얼음 녹듯 소멸되어 개선의 노래가 하늘에 떠 있고 환호의 소리는 땅을 뒤흔들었습니다······부처님의 붙들어 주심에 보답하고, 산신령님의 도와주심을 갚으려고, 특별히 맡은 관사에 명하여 불당을 창건하고는, 이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왕건은 후세에게 명심하라고 내린 「훈요십조」에서 “차령 이남 공주강(금강) 밖은 지세 인심이 다 간교배역하니 저 아랫녘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하여 정병을 잡으면 혹 국가를 변란케 하며 혹 통합의 옛 원한을 펴리니 비록 그 양민이라도 벼슬을 주거나 쓰지 말라”고 하였다.

차령 이남 공주강 밖은 곧 공주 아래쪽의 논산 이하 전라북도를 이름이니 이는 후백제 지역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한 왕건이 아예 그 싹을 잘라야 한다고 당부한 말로 ‘지역 감정’을 부추긴 원초적인 명제라고 할 만하다. 왕건은 그토록 후백제 세력을 두려워하여 경계하였고, 후백제를 격파한 것을 길이길이 기억시키려고 개태사를 세운 것이다.

이 절에는 왕건의 영정이 설치되어 기일마다 제사를 지내며 그의 옷 한 벌과 옥대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번창하던 절이 고려 말에 이르러서는 세 차례에 걸친 왜적의 침입으로 무너졌고 조선 시대에도 불교 진흥책을 썼던 세조 때까지는 그런대로 면모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나 그 뒤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석불은 도랑에 묻히고, 가마솥은 홍수에 떠내려가 절의 자취도 없어져 500년 동안 면목없이 되었다가 1930년에 들어서야 한 여승의 힘으로 다시 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개태사 극락대보전에는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사지석불입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옛 백제인을 떠올리게 하는 사지석불입상은 투박하지만 정감이 가는 모습이다. 최근 국보로 지정된 관촉사의 은진미륵과 함께 개태사의 석불입상은 민중 불교의 진수를 보여준다.

옛 영화는 자취가 없고 천호산 아랫자락을 베개삼아 기대 있는 이 절에는 개태사 창건 때의 것으로는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삼존불 입상과 함께 큰 무쇠솥이 있으며 다른 당우나 요사채는 모두 그 뒤의 것들이다.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은 고려 때의 것으로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274호이다. 원래 절터는 지금 절집이 있는 곳에서 동북쪽에 있는데 그곳 건물자리에 주춧돌, 석불대좌와 함께 석조가 있으며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275호로 지정되었다.

태조 왕건이 고려의 왕실 사찰로 창건한 개태사는 2013년에 어진전을 건립했다. 태조 왕건의 어진을 봉안한 어진전에 들어서면 옛 문헌을 고증 삼아 그려진 왕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러분도 개태사의 어진전에서 상상 속의 왕건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기 바란다.

개태사의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에 오층석탑이 있습니다. 인도에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다는 오층석탑은 규모는 작지만 단아한 기품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불교를 국가의 종교로 삼았던 고려 왕실의 사찰이라면 화려하고 큰 석탑을 축조했을 법도 하지만 개태사는 민중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그런 연유로 개태사의 오층석탑에서는 소박함을 느낄 수 있다.

◆석조삼존불입상

석조삼존불입상
석조삼존불입상

절 문으로 들어서서 왼편 오층석탑 뒤쪽의 대웅전 안에 모셔져 있다.

조선 시대에 폐사로 되어 있는 동안 가운데부처님은 뒤로 도랑에 넘어져 나가 허리가 엇끊어져 있고, 보살들은 앞으로 엎어져 목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몸체에 그 잘라졌던 흔적이 보인다. 본존의 높이는 4.15m, 왼쪽 협시보살상은 3.53m, 오른쪽 협시보살상은 3.46m이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광배가 있었을 터이고 그 높이를 추산해 보면 5m가 가까운 장륙상1)이었을 듯하다. 개태사 창건 당시인 936년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제219호이다.

이 부처들은 한눈에도 체구가 매우 건장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어깨보다도 발목 부근이 더 넓어 매우 든든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편편하고 넓은 얼굴이나 가슴께로 들어올린 손이 마치 권투장갑을 낀 것처럼 매우 커서 그런 느낌을 한층 북돋운다. 시무외인2)을 한 손은 후대에 보수로 한층 도식적으로 되었다.

왼쪽 협시보살상은 머리 부분이 나중에 보수하여 붙인 것이기도 하지만, 삼존불 모두가 표정도 매우 굳어 있어 인자하고 자비한 부처님의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뒤쪽으로 돌아가서 자세히 보면 연꽃대좌나 협시보살의 영락장식 조각들은 매우 화려한데도 이 삼존불이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무사와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인상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일 듯하다.

이는 아마도 왕건이 개태사를 창건한 동기가 후백제 유민을 달래고 살육한 병사들의 원혼을 위무한다는 표면적인 것보다는 실상은 고려조의 권위와 무엇보다도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하는 모습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표정이 굳고, 얼굴형이 삼각형이며 코가 작고 입이 빈약한 점 등, 사실성보다는 도안적 성격이 강한 얼굴은, 친근감이 도는 삼국시대 불상이나 사실성이 강한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과는 다른, 신라 말 고려 초기 불상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 고려 시대에는 지방적 양식을 띤 불상이 많이 조성되었는데 이 개태사 삼존불처럼 몸통이 거의 원통형의 체구를 이루어 괴량감을 주는 것이 많다.

마당에서 정면으로 축대 하나 위쪽에 있는 단군전이나 그 옆의 팔각당은 민간신앙과 어느 정도 습합한 면모를 보여 주는 듯도 하다. 특히 팔각당 안에는 시렁 위에 층층이 방석을 쌓고 동자부처를 모셔 앉힌 모습이 매우 넉넉하여 절로 웃음짓게 한다.

◆가마솥

가마솥
가마솥

개태사의 명물은 단언컨대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확(솥)이다. 왜구의 침략이 빈번하던 시절에 개태사의 승려들은 철확에 밥을 지어먹고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름 3m, 높이 1m, 둘레 9.3m나 되는 큰 무쇠가마솥(철확)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절을 세우고 승려 500명의 밥을 지을 솥으로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이리도 큰 솥이 한동안 긴 유랑생활을 했다. 본래 개태사에 있었으나, 개태사가 폐해 있는 동안 큰 장마에 떠내려가 그 4㎞ 아래 지점인 연산읍 앞냇가에 파묻혀 있기도 했다. 일제 때인 1935년에는 일본 사람들이 이 솥을 징발하여 일본에 가져가려고 부산까지 갔는데, 선적을 기다리는 동안에 가마솥에서 큰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선적이 보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서울의 당시 총독부박물관에 있었는데, 솥을 옮겨간 뒤에 연산에 재해가 계속되자 그것이 가마솥을 가져갔기 때문이라는 여론이 높았고, 이곳 연산번영회의 사람들이 조선총독부에 진정하여 마침내 연산공원에 옮겨다 놓았다가 뒤에 다시 개태사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그 거처를 네 번이나 옮겨다닌 셈이 된다. 재앙이 여기에서 그치지 않아 일제 말기인 1944년에는 이 솥을 녹여 전쟁의 무기를 만드는 데 쓰려고 일본 사람들이 솥을 깨려고 하자, 일하던 사람들은 별안간 죽을병에 걸리고, 그에 관계된 사람들도 모두 중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불행중 다행으로 개태사에 안착하여 연산 사람들이 염라대왕 앞에 가서도 개태사 가마솥을 보고 왔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개태사 출토 청동북

국립부여박물관에는 개태사에서 출토된 화려한 청동북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청동북 가운데 가장 커서 지름이 105㎝나 된다. 청동북은 앞면에 네줄 띠를 두른 가운데 화려한 보상당초문을 섬세하게 새긴 것으로 보아 개태사가 매우 번성하던 시절인 13세기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천연기념물 오골계 사육마을
천연기념물 오골계 사육마을

개태사가 있는 천호리에서 대전 쪽으로 조금 가면 나오는 화악리는 천연기념물 제265호인 오골계 사육마을이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오골계는 허약체질, 고혈압, 신경통, 결핵 등 허약해진 사람의 보신용으로 매우 좋다고 한다.

개태사는 매월 초하루 10시에 법회를 열며, 매월 음력 18일 오전 10시와 넷째 주 토요일 저녁 10시에 철야기도 등을 올린다. 불자라면 호국사찰 개태사를 찾아 소원성취 기도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해 보는 것도 좋겠다.

논산군(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에 있다. 논산사거리에서 대전 방향으로 1번 국도를 따라 17.4㎞ 가면 개태사역 앞 바로 못미처 길 오른쪽으로 개태사가 나온다. 지나치기 쉬우므로 연산사거리를 지나면서부터 주의해야 한다. 연산사거리↔개태사까지는 약 4.4㎞ 정도이다.

개태사에는 주차시설이 따로 되어 있지 않으나 절 입구 약수가든 옆 공터에 대형버스도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다. 숙식할 곳은 따로 없다. 논산에서 개태사 앞을 지나는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있다. 개태사역에는 비둘기호가 정차한다.

 

 

 

주상호 기자    js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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