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 스토리 6] 'Saint Laurent(생 로랑)' 인연 같은 악연 DIOR(디올)①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이브 생 로랑 디올 수석 디자이너 생 로랑 디올과의 악연 생 로랑 디올 컬렉션

2021-06-10     이하경 기자

[월드투데이 이하경 기자]  젊은 나이에 데뷔해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 이브 생 로랑. 

오늘은 패션사에 큰 획을 그은 그가 남긴 작품인 브랜드 생 로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 로랑의 역사

창립자 이브 생로랑

이브 앙리 도나 마티외 생로랑은 1936년 8월 1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보험 중개인으로 극장을 소유한 부유한 집안이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이브 생 로랑은 연약하고 운동을 못하는 소심한 성격의 아이였다.

그는 학교에서 인기가 없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자주 괴롭힘을 당했고, 내성적이고 항상 어딘가 아픈 예민한 아이였다. 이런 그가 유일하게 위안과 관심을 가진 곳이 문화, 예술 분야였다. 

오트 쿠튀르

그는 두 명의  여동생들과 고급 여성복을 의미하는 '오트 쿠튀르'를 만들어 인형 놀이를 했으며,  어머니와 여동생의 드레스를 디자인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브 생 로랑은 크리스티앙 베라르가 디자인한 작은 정원, 침실, 샹들리에 등으로 구성된 무대 세트와 섬세한 고전 의상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서 연극 무대와 의상을 직접 만들어보며 창작에 대한 꿈을 키웠다. 


패션계에 입문

그는 1953년 당시 저명한 디자이너였던 크릿티앙 디올, 위베르 드 지방시, 쟈크 파트 등이 심사하는 국제 양모 사무국 디자인 컨테스트(International Wool SecretariatCompetition)에 3개의 스케치를 제출했고  '드레스' 부문에서 3등을 수상했다.

이 시기 프랑스에 머물고 있던 생 로랑은 재능 있는 새로운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잘 지원해주는 인물로 알려진 프랑스 보그의 편집장 미셸 브루노프를 만난다. 미셸은 생 로랑이 가지고 온 스케치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되고 '제대로 된 패션 디자이너가 돼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보그 편집장 미셸 브뤼노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생로랑은 파리 의상 조합 학교에 입학했지만 정규 디자인 수업에 실망하고 3개월 만에 자퇴한다. 그리고 같은 해 말 다시 국제 울 사묵국 대회에 출전해 친구 페르난도 산체스와 당시 젊었던 독일 유학생 칼 라거펠트를 제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1955년 생 로랑은 우승 직후 몇 장의 스케치들을 미셸 편집장에게 가져다 주었다. 이를 보던 미셸은 크리스챤 디올이 그날 아침 자신에게 보여준 아직 발표하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의 가을, 겨울 컬렉션의 A라인 스커트와 비슷하다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곧바로 생 로랑을 디올과 만나게 했으며 디올은 그 자리에서 즉시 생 로랑을 어시스턴트 디자이너로 채용한다.

디올

디올은 생 로랑의 천부적인 재능을 금방 알아보았다. 생 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과 악세서리 디자인을 도우며 크리스찬 디올이 가장 많이 의지하고 조언을 구하는 디자이너로 성장한다. 

1957년 크리스찬 디올의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한 의상이 35벌에 달할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커졌다. 1957년 8월, 디올은 생 로랑의 어머니를 직접 만나 '나의 뒤를 이을 디자이너로 생 로랑을 선택했다'고 그녀에게 이야기 한다.

당시 디올의 나이는 52세에 불과했기에, 후계자 이야기를 하기엔 조금 이른 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0월, 디올이 이탈리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며 생 로랑은 21살의 젊은 나이에 디올 하우스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맡게 된다. 


디올 컬렉션

생 로랑의 1958년 1월 30일 이브 생 로랑은 디올에서의 첫 봄 컬렉션으로  트라페즈 라인(Trapéze Line)을 선보였는데 '트라페즈 드레스'는 사다리 형태를 띈 원피스와 스커트로 매우 참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트라페즈 라인
트라페즈 라인

이 디자인으로 크리스찬 디올은 재정적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생 로랑은 국제적인 스타덤에 오른다. 이 시기 그는 국제 언론들이 자신의 긴 이름을 적기에 불편할 거라는 생각에 그의 이름을 '생 로랑'으로 줄였다. 

같은 해 8월, 생 로랑은 가을 컬렉션에서는 느슨한 실루엣에 길이도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드레스를 발표했다. 젊은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보수적인 중 장년층에서는 혹평을 받게된다.

1959년, 디올 경영진은 생 로랑에게 보수적인 고객들의 취향에 맞는 컬렉션을 선보일 것을 권유했고, 생 로랑은 안정적이고 우아하며 길이도 긴 옷으로 다시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성공한다.

그러나 디올의 네 번째 쇼에서 밑이 좁아지는 스커트로 걸을 때 '절룩거린다'는 뜻을 가진 호블 스커트를 디자인하며 외면 받는다. 

호블 스커트

크리스찬 디올 경영진은 생 로랑에게 경고 조치를 내리지만 디올이 여섯 번째 컬렉션인 1960년에 젊은 사람들의 스트리트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의 옷을 선보여 고객들을 경악하게 만든다.

비트룩

결국 크리스찬 디올 하우스의 소유주 마르크 부삭은 고객 층의 요구로 생 로랑을 내보내기 위해 군으로 입대 시켜 버린다. 

그리고 공석이 된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마르크 보앙을 새로 임명한다.하지만 로랑은 입대 한지 3주 만에 거친 남자 집단에서의 부적응과 선임병들의 괴롭힘으로 인해 극도의 신경 쇠약과 건강 이상으로  면제가 된다.

군은 생 로랑을 디자인 하우스가 아닌 정신병원 보낸다. 정신병원에서 생 로랑은 전기 치료와 약물 치료로 고통을 받고, 퇴원 후에도 약물 중독으로 오랜 시간 고생했다고 전해진다. 병원에서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생 로랑에게 디올은 해고를 통보하고 생 로랑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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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입생로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