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o Z of EU] 끝나지 않은 브렉시트, 구인난 시달리는 영국
오랜 기간의 봉쇄령 해제됐지만 일손 부족 브렉시트, 코로나19로 이민 노동자의 발걸음 끊기다
[월드투데이 전유진 기자] 1997년 이후 최악의 구인난이 영국에 닥쳤다. 백신 접종이 속도를 내며 경제활동 정상화에 들어갔지만 정작 기업들은 일손 부족에 직면했다.
◆ 영국에 벌어진 채용전쟁
영국에서 웃돈을 주면서 채용을 하는 '채용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7월 영국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는 입사 지원금 1000파운드(약 160만원)을 지원하며 트럭 운전기사 채용에 나섰다. 웃돈을 주면서 트럭 운전기사를 구하는 데에는 자국 내 운송 인력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단이었다.
영국 최대 요양원 운영업체 HC원은 신입 야간 간호사에게 1만파운드(약 1600만원)의 입사 보너스 지급을 결정하기도 했다.
◆ 부족한 운송업자
영국 통계청에 의하면 운송, 물류 관련 근로자를 채용하는 온라인 구인 광고 수가 팬데믹 이전보다 4배 이상 급증했다. 또한 현재 영국 내 필요한 대형트럭 운전기사가 9만 명에 달한다. 운전기사의 급여를 10~20% 인상했으나 여전히 채용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 영국 식품기업, "재소자도 고용하게 해달라"
운송업체 뿐만 아니라 식품기업도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고육지책으로 영국 식품기업들은 일시적으로 재소자를 고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당국에 호소했다.
영국 육류공급자협회는 일정 임금을 주고 재소자와 전과자를 채용하는 방안을 법무부와 협의하는 중이다. 이 협의가 마무리되면 식품회사들은 임시 석방된 재소자를 일용직으로 채용할 계획이다.
토니 구저 육류공급자협회 대변인은 "재소자 채용 계획은 직원을 구하기 어렵다 보니 짜낸 해결방안"이라고 설명했다.
◆ 바뀐 영국 식당 풍경
일자리가 부족하다보니 식당 풍경도 바뀌었다. 최근 영국의 식당에 가면 온라인으로 메뉴를 확인한 뒤 결제까지 하라는 곳이 적지 않다. BBC는 최근 식당, 술집 등 환대업종에 빈 일자리가 기록적인 수준으로 많다고 보도했다.
◆ 영국 전반에 퍼져 있는 구인난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구인난이 식품기업, 운송업, 요식업뿐만 산업 전반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 회계, 엔지니어링 등 고숙련 일자리도 마찬가지이며, 특히 레스토랑과 호텔 등 저임금 서비스업의 구인난이 심각하다.
영국 상공회의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5700개 기업 중 70%는 6월 기준 지난 3개월 간 직원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올해 2분기에 빈자리는 110만 개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2019년 같은 기간에 비해 12% 증가한 수치다.
◆ 구인난의 원인?
왜 영국은 일할 사람이 없는 걸까?
신속한 코로나19 백신 접종과 봉쇄 완화 등으로 경기가 빠르게 회복돼 일자리가 크게 늘어난 것 역시 구인난의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원인은 빠른 경기회복만이 아니라고 분석한다. 크게 두가지가 그 원인으로 꼽힌다. 브렉시트와 코로나19이다.
◆ 브렉시트로 매력이 떨어진 영국 일자리 시장
구인난이 시작된 것은 브렉시트 이후부터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의미하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에 있던 EU 노동자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영국과 EU내 자국을 자유롭게 오가며 일하던 노동자들은 브렉시트 이후 한국인 등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취급되며 영국에서 일하려면 비자가 필요 해졌다. 즉 일을 하기 위한 과정이 까다로워진 것이다.
영국 화물운송협회에 따르면 브렉시트로 영국을 떠난 EU 출신 트럭 운전기사는 약 2만5000명에 달한다.
여기에 코로나 19까지 겹치며 본래 유럽연합 시민이었던 노동자들은 영국을 떠나 자국으로 향하고 있다.
더 이상 영국이 노동자들에게 매력적인 국가가 아니게 된 것도 이번 구인난에 한 몫 한다.
◆ 코로나19로 감소한 노동자
코로나19로 자가격리에 들어간 노동자가 늘어난 것도 일손부족의 한 원인이다.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앱의 알림을 받은 노동자는 자가격리에 들어가야 한다. 이로 인해 슈퍼마켓 곳곳의 선반이 텅텅 비기도 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한 주에 100만 명 이상이 자가격리 통보를 받았다.
영국 정부는 뒤늦게 필수 분야에서는 자가격리를 면제한다고 밝혔지만 현장에선 인력이 이미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코로나19 봉쇄 중 일이 쉬운 플랫폼 노동 등으로 '전직'한 경우가 많다. 특히 사람을 만나는 서비스업, 혹은 식당 등의 직종이 코로나 19 봉쇄 정책으로 일이 불가능하며 이직이 더욱 빠르게 증가했다.
◆ 이민 노동자의 빈자리
한편, 브렉시트와 코로나19로 인한 영국의 인력난은 이민 노동자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영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한 이민 노동자들이 브렉시트와 코로나19로 영국을 떠나가자 인력난이 발생중이라는 것이다.
지난 2019년 기준 영국인이 아닌 이민자 수는 약 620만 명으로 이들은 제조업, 건설업을 비롯해 식당과 호텔 등 저임금 서비스업 일자리에 종사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7월부터 2020년 9월까지 약 130만 명의 외국인이 영국을 빠져나갔다.
즉 영국의 경제활동 재개로 인해 구인 수요가 증가했지만 이미 이민 노동자 상당수가 고국으로 돌아간 상태인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심각한 코로나19 때문에 쉽사리 영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으며 브렉시트 이후 이들의 비자 발급과 입국 절차는 더욱 까다로워졌다.
고용주들은 영업을 재개하려고 직원을 뽑으려 하지만 이민 노동자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영국인들만 고용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동안 영국인이 기피하던 일자리를 이민 노동자들이 채워줬지만 임금도 낮고 노동환경도 열악한 일자리를 자국민들이 갑자기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며 필요한 기술을 갖춘 자국민들도 많지 않다. 이에 업계에서는 정부가 이민 정책을 다시 완화해야 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 강경한 영국 교통부
실제로 중장비 운전기사에 대한 단기 비자 발급에 대한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 교통부는 단기 비자 발급 계획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또한 이민 노동자들에게 의존하는 대신 자국민에 대한 교육 및 훈련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가 주장한 교육 및 훈련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정부가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는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국 소매산업협회의 타마라 힐 고용정책 자문은 "정부의 훈련 프로그램은 필수 기술을 갖춘 사람들이 부족한 문제를 해소하는 데 역부족"이라고 밝혔다.
◆ 구인난의 영향
구인난이 영국의 경제 성장세마저 꺾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영국의 8월 종합 구매관리자지수(PMI)는 6개월 만에 최저치인 55.3을 기록했다. 5월 62.9로 정점을 찍은 후 급락하는 추세다. 체감경기를 보여주는 PMI는 50이 넘으면 경기 확장을 뜻한다.
IHS마킷은 "구인난과 원자재 부족으로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는 기업이 평소보다 14배나 많다"며 "1998년 이후 최악"이라고 했다.
키에란 톰프킨스 캐피털이코노믹스 이코노미스트는 "경제 회복세가 예상보다 더 빠르게 둔화할 수 있다"며 "인플레이션 역시 높은 수준으로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 경제 재개했지만, 일할 사람이 없어
오랜 기간 전면봉쇄령을 내렸던 영국은 8월부터 봉쇄를 완화하고 술집과 식당 등의 실내 영업을 재개했다.
자유를 기뻐한 영국인들이 펍을 찾아가도 펍 운영자들은 구인난때문에 실내 영업 재개에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영국 고용주들은 경제활동 재개로 인한 기쁨도 잠시 이민 노동자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리고 브렉시트의 부작용을 몸소 느끼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백신이라는 해결책이 있지만 브렉시트는 영국이 장기적으로 안고 가야 할 이슈이다.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의 조나단 포르테스 경제공공정책학 교수는 "코로나19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떠났지만 그들은 브렉시트 때문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