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떠났지만 남긴 발자취는 영원히 살아 국민들 애 간장 녹여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7 주기가 다가오면서 새심 그를 그리워하는 국민들이 많아 그가 이 세상을 떠난 그곳에는 추모의 열기가 아직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면서 그가 그토록 갈망해온 농사를 짓는 대통령의 길을 걷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고 박연차와 친분이 있던 노무현의 가족들이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 서민과 함께 살아온 노무현 전 대통령
이러한 수모속에 그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사후 1주일 동안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현재까지 국민 가슴속에 침묵의 고요를 남겨두고 있는 비운의 대통령이자 서민의 대통령이었다.

이에 대해 정계의 한 전문가는 “누모현 전 대통령이 그리운 것은 항상 국민의 편에서 살아온 응어리의 삶이기에 요즘 더욱더 그가 그리운 것이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삶은 항상 국민과 가지지 못한 자의 몫으로 남겨진 참다운 살아온 이시대가 낳은 영웅 중 한명이다.

대통령 후보시절 민족의비극인 장인의 죽음을 향해 진실을 향해 울부짓던 그가 더욱더 못견디게 그리운 것은 서민의 살기좋은 신바람 나는 세상을 추구하던 그의 서민적인 모습을 국민들은 그리워하는 것이다,

가지지 못한 자의 삶을 산 영원히 위대한 대통령의 삶

▲ 청와대에서도 손자와 함께 자전거를 즐겨 탄 서민의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간 휴학한 뒤 부일장학회의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에 다니다가 1963년에 가까스로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여 1966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 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과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결국 그만두었다. 이후 막노동과 사시 공부를 병행하였다.

1968년 군에 입대하여 제12사단 을지부대에서 육군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1972년 27세에 권양숙과 결혼하였고 1973년에 아들 건호를, 1975년에 딸 정연을 낳았다.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이는 4번째 도전에서 이루어진 성과였고 노무현은 제17회 사법시험에서 유일하게 고졸 출신 합격자였다. 이후 대전지방법원의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5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978년 5월 무렵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후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롭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라고 밝혔다.

▲ 국민에게 슬픔만 안겨주고 영원한 길으 떠난 노무현 전 대통령
이후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하고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았다.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직 권한이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기도한 파란만장한 삶을 산 대통령이다.

한편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으며 임기 내내 부동산 시장과 증시가 활황을 보였는데, 이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대통령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보수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재벌 총수들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재벌개혁 중 하나인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 시행, 재벌기업들 사이의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도 강화한 것 등이다. 대통령이 자기 진영의 불법대선자금을 앞장서 밝힘으로써 정경유착을 상당히 완화한 것도 높게 평가받았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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