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준에 동결된 아프간 정부 자금으로 배상 요구한 희생자 유족들
탈레반과 아프간 인권단체, "공적 자금 훔치는 행위"라고 비난

[사진=픽사베이]
[사진=9·11 테러 당시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 픽사베이]

[월드투데이 유효미 기자] 미국이 '9·11 테러' 유족 배상에 아프간 정부의 자산을 일부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탈레반과 인권 운동가들이 강력한 반발에 나섰다. 지난 11일(현지시간) 탈레반 정부 대변인인 모하마드 나임은 미국에 의해 동결된 아프간 국민의 자금을 훔치고 압류하는 것은 최하 수준의 도덕적 부패라고 크게 비난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9·11테러 희생자 유족들이 뉴욕 연준에 동결된 아프간 정부의 자금 70억 달러(약 8조4천억 원) 중 절반가량에 달하는 35억 달러(약 4조2천억 원)를 받는다고 밝혔다. 남는 동결 자금은 아프간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사진=지난해 9·11 테러 20주년 행사에 모인 희생자 유족들, EPA/연합뉴스]

9·11 테러 희생자 유족, 아프간 자금으로 배상 받을 수 있게 됐다

앞서 희생자 유족들은 9·11 테러 직후 탈레반과 알카에다, 이란 등 사건과 관련한 집단과 국가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낸 바 있다. 테러 당시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 폭발 등으로 사망한 사람은 3000여명이었다. 그리고 지난 2012년 미국 법원서 열린 재판은 유족들의 승리로 끝났으며, 유족들이 받게 될 액수는 70억 달러로 결정됐다. 

다만 당시로서는 9·11 테러를 주도한 알카에다를 비롯해 오사마 빈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탈레반에게 배상금을 받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탈레반이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뒤 상황은 뒤집혔다. 탈레반이 아프간의 합법 정부라면 연방준비은행에 예치된 자금도 탈레반의 자산이 된다는 이유였다. 

상황이 급변하자 9·11 유족은 법원에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예치된 아프간 정부의 자금을 배상금으로 압류할 것을 요청했다.

법적으로는 유족의 요구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미국 정부는 다양한 법적, 외교적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는 이유로 법원의 결정을 미루게 했다. 이후 고민을 거듭한 미국 정부는 결국 아프간 자산 절반을 압류해 유족들에게 배상금으로 지급하도록 허용했다. 

[사진=총으로 주민들을 통제하는 탈레반, EPA/연합뉴스]
[사진=총으로 주민들을 통제하는 탈레반, EPA/연합뉴스]

탈레반 재집권하자 아프간 자산 동결한 미국

지난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아프간을 집권한 레반은 9·11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 수장 오사마 빈 라덴의 은닉을 돕다가 미군의 침공을 받고 정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이후 오랜 내전 끝에 지난해 8월 재집권에 성공했다. 결국 20년 만에 아프간의 정권을 잡은 탈레반은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미국은 연준에 예치된 아프간 정부의 자산 70억달러를 동결했다. 탈레반 집권 후 동결된 아프간 정부의 해외 자산은 이를 포함해 9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외화 유입의 차단으로 아프간 화폐 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는 상승했고, 원래도 불안했던 아프간 경제는 더 위태해졌다. 위기에 처해진 탈레반 정부는 국제사회에 동결된 해외 자산의 해제를 꾸준히 요구해왔다. 

[사진=탈레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AFP/연합뉴스]
[사진=탈레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AFP/연합뉴스]

미국 비난하는 탈레반과 아프간 인권 단체, "엄연히 공적 자금 훔치는 행위"

이번 미국 정부의 조치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탈레반뿐이 아니다. 아프간 인권운동가들 역시 이의 제기의 목소리를 냈다. 

아프간계 미국인 인권운동가 빌랄 아스카리아르는 "아프간 국민은 9·11테러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결정은 빈곤에 처한 국가의 공적 자금을 훔치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인권 단체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아프간'의 설립자 할레마 왈리도 "(동결된) 아프간 중앙은행의 자금은 심각한 인도주의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프간 국민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일각에서는 미국의 조치가 논리적인 모순에 부딪힌다고 주장했다. 국제사회가 탈레반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미국이 아프간 정부의 동결 자산을 압류하는 것이 맥락에 맞지 않다는 설명이다.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RW)의 아시아 담당 존 시프턴 국장은 "어떻게 한 국가의 자산이 주권 정부로 인정받지 못한 단체의 빚을 갚는 데 사용될 수 있는가"라고 반문을 던졌다. 또 미국에 예치된 아프간 정부 자금이 탈레반 자금으로 여겨져 압류되면 미국이 탈레반을 아프간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하는 것으로 여겨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저작권자 © 월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