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의 아들 이이 한 때 스님이 되는 꿈을 꾼 세가지 얽힌 42년 삶과 인연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가의 최고의 영웅으로 뽑은 인물가운데 으뜸으로 차지하는 이가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년)는 퇴계 이황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사림으로 흔히 퇴계를 영남학파, 율곡을 기호학파의 대표라 하여 경쟁 관계로 여기는데, 이는 퇴계의 영남학파가 동인 정파로, 율곡의 기호학파가 서인 정파로 전환되어 정쟁을 한 데서 생긴 오해이다.

▲ 율곡 이이 선생과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
이들은 35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성리학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 때문에 만나자마자 의기 상통했고, 학문적으로 보완하는 관계였다. 퇴계가 새로운 시대 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한 인물이다.

퇴계는 끊임없이 사직소를 올림으로써 훈구 세력에게 저항했고 그에 비하여 율곡은 개국 200여 년이 경과하면서 말폐 현상이 나타난 조선의 사회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퇴계를 비롯한 선학의 학문적 성취와 선조(宣祖)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학의 학문적 성취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 사회에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고, 사가(私家)에서 성장하면서 사림 출신의 선생에게 배운 선조는 사림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것.

한편 율곡의 일생을 시기에 따라 구분하면 29세까지를 성장기, 30세부터 49세로 사망할 때까지를 사환기(仕宦期)로 파악할 수 있다.

율곡 이이는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 라고 북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한 파란만장한 삶을 산 비운의 학자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함께산 강원도 강릉의 오죽현
또 이이선생은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1591년에는 광국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 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한편 이이 선생은 조선의 선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어린 나이에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를 했고,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유능한 인재였다.

이이와 이황, 기대승, 조식 등 대학자들이 16세기에 태어나거나 활동한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조선의 성리학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를 거쳐 이들로 이어지면서 꽃을 피웠다.

이이는 덕수 이씨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사이에서 1536년(중종 31년) 강릉 북평현에서 태어났다. 강릉은 신씨 집안이 오랫동안 세거한 지역인데, 아버지 이원수는 처갓집에서 데릴사위처럼 살았다. 학문과 그림으로 명성을 떨친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이이를 직접 가르쳤다. 이이의 천재성과 신사임당의 명철한 교육이 대학자를 탄생시킨 것이다. 신사임당은 '어린아이의 머리는 백지와 같다. 부모의 가르침으로 백지에 무엇을 그리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이는 신사임당이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며 자랐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신사임당의 치마폭에 안겨서 자연스럽게 글을 익혔다. 어머니는 이이에게 강제로 공부를 시키지 않고 놀이를 하듯이 글을 읽게 함 것이 전해내려오는 유명한 일화이다.

이와함께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던 이이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별새 했을 떼 스스로 3년 동안 어머니의 무덤 옆에 묘막을 짓고 생활하며 어머니의 명복을 빌었다. 또 아버지가 병으로 누웠을 때는,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 경기도 파주에 있는 율곡 이이의 무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사후 자녀들은 서모인 권씨 부인에게서 수난을 겪어야 했다. 온후하고 자상한 어머니였던 신사임당과는 달리 권씨 부인은 술을 무척 좋아해서 새벽부터 술을 몇 잔 마셔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는 성격이었고,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도 빈 독에 머리를 박고 엉엉 울어댄다든가 노끈으로 자살 소등을 벌이는 등 행패가 심하였다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은 말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이이는 가출을 감행할 정도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의 오랜 병환과 죽음은 그에게 심적,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그는 사람이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면서 한동안 방황하게 된다. 결국 시묘살이를 마친 뒤 금강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그가 뒤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뒤에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준 것은 스승 백인걸과 오랜 친구 성혼이었다.

한편 이이의 학문세계는 불교와 접맥된 흔적이 많다.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하나이면서 둘[一而二]이요, 둘이면서 하나[二而一]라든가, 이와 기를 둘 아닌 하나(理氣一元論)로 보는 이론들은 이황에서 훨씬 발전된 사상이면서 불교적 영향이 스며 있는 것이었다.
20세에 ‘자경문’을 지어 자신의 일생 동안 경책으로 삼았고, 33세 때는 관직을 내놓고 해주로 가 머물면서 수양산 지맥에 자리잡은 고산 석담구곡을 찾아 ‘고산구곡가’를 지으니 곧 성리학의 본령인 주자를 본받음이었다.

42세에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격몽요결’(擊夢要訣)을 지었던 이이는 49세를 일기로 서울 대사동에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 선영에 묻혔다. 저서로 ‘율곡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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