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혀진 진실 “이자겸의 난 실패는 척준경 배반 때문 권력을 빼앗긴 반역사건의 진실은?

[월드투데이 김복희 기자]

한국사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자겸의 난’에 얽힌 비밀이 밝혀져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대한 진실에 대한 목소리가 높다.

이처럼 역사 속에 감춰진 진실이 왜곡되어 이자겸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가 ‘난(亂)’을 일으켰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난을 일으킨 것은 이자겸을 죽이려는 세력이 맞서 궁궐의 피비린내 사건으로 비약된 고려의 서글픈 역사가 담겨 있다.

현재까지 이자겸의 난은 1126년(인종 5년)5월에 이자겸이 인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일으킨 난으로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 고려벽화에 등장한 왕후와 신하모습
고려 인종때의 척신인 이자겸의 본관은 인주(인천)이다. 그는 중서령 이자연의 손자이며, 경원백 이호의 아들이다. 그는 음보로 합문지후에 이르렀으나, 그의 누이동생인 순종 비가 왕이 승하한 뒤 궁노와 간통한 사실이 드러나, 이 사건으로 그도 연루되어 면직되면서 그는 밤의 역사속에 감춰진 인물이되고 만다.

밤의 역사인 성추문사건으로 야인되되기도 한 그는 1108년(예종 3년) 그의 둘째 딸이 16대 예종의 비(문경황후)로 책봉되자, 일약 익성공신이 되었으며, 소성군 개국백에 봉해지는 등 여자로 인해 파국에 이른 그가 그의 딸로 인해 다시 정계 전반에 나서는 아이러니를 느끼게 해준다.

그러다가 1122년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서서하자, 왕위를 탐내고 있던 그는 왕의 동생들과 다른 왕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1115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던 15살의 외손자인 해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이 외손자가 바로 고려 17대왕인 인종이다.

이렇게 하여 권세를 한손에 넣게 된 이자겸은 양절익명공신이 되었으며, 동시에 중서령.소성후 등 주요관직을 겸하고 정권을 한손에 쥐고 흔들었다.

이후 이자겸의 난의 배경은 고려 인종(1122~1146)때 최고 권력자였던 척신 이자겸 등이 인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고자 일으켰던 반란이다.

당시 고려는 문종을 거치면서 문벌귀족 중심의 사회로 자리잡았고 이들은 혼인을 통해 자기 가문의 세력을 확장했는데, 왕실과의 혼인으로 자신의 가문 위상을 높이고 정치적인 출세도 쉽게 이루어 냈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바로 이자겸의 집안이었던 인주(仁州 또는 지금의 인천)이씨였다.

인주 이 씨는 문종 때 이자겸이 세 딸을 문종의 후비로 보낸 후 인종때까지 7대 80여 년 동안 외척으로 크게 세력을 떨쳤다.

당시 왕자나 왕녀는 거의 그들의 외손이었고, 그러한 인주 이씨 가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자겸 이었다.

이자겸은 예종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선 후 권력 유지를 위해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시집보냈다.

인종은 이로써 이모들과 근친혼을 하게 된 것인데, 이자겸은 외척의 지위를 이용해 국가 권력을 쥐게 되었다.

하지만 인종 입장에서는, 비록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었지만 왕인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것에 대해 부담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이에 이자겸이 눈치를 채고 부하인 척준경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궁궐로 들어가 건물을 불태우고 인종을 잡아 이자겸의 집에 가두었는데, 이 때 인종이 척준경을 설득해 오히려 이자겸을 붙잡아 전라도 법성포로 유배를 보냈다.

그 후 지방 출신의 신진 관료 세력을 활용해 척준경을 제거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로인해 인종의 왕비였던 이자겸의 셋째, 넷째 딸들은 모두 폐비되었고, 그후 이자겸과 그의 처, 이지윤을 비롯한 다른 아들들은 영광으로 유배당했으며, 그 외 이자겸의 측근들도 모두 유배 조치를 받게 되었다.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이자겸의 셋째 딸 폐비 이씨, 넷째 딸 폐비 이씨)도 폐위되고 난 뒤 이후 인종은 중서령 임원후의 딸(공예왕후)과 병부 상서 김예의 딸(선평왕후)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절대 권력자 이자겸은 1126년 12월에 유배지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면서 한 많은 삶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이후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를 물리친 일등공신이라는 배경을 맏고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다가 정지상의 탄핵을 받아, 1127년 3월에 암타도로 유배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1128년에는 다시 그의 고향인 곡주로 이배되었다. 그러나 인종은 그의 지난날 공로를 참작하여 1144년(인종22년)에 다시 그를 조봉대부 검교호부상서에 등용하려 했으나, 그해 등창으로 인하여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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