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주년 4.19혁명 기념식이 오늘 오전 10시 국립 4.19민주묘지에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리면서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일컫는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다시 혁명으로 승격되었다.

4.19혁명은 1960년 1월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운동 도중 신병 말기라는 판정을 받게 되어 하와이 병원으로 입원하였으나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면서 시초가 됐다.

이승만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도록 하는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고 한다.

이에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감은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고, 이 후 4월 18일의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다.

이 후,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후 대통령 이승만을 독재의 권좌에서 끌어내린 4·19혁명이 완성 되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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