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산 석유 소비에 죄책감 느낀 독일인들
‘차 없는 날’, ‘연료 보조금’ 등 에너지정책 갑론을박
탄소감축이냐? 가계안정이냐? 기로에 선 독일
[월드투데이 노만영 기자] 독일에서는 일주일에 한번 운전을 자제하는 '차 없는 날'에 대한 찬반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최근 독일 방송사 벨트는 일요일에 차량운행을 자제하는 '차 없는 날' 캠페인에 대한 설문응답을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48%는 지지를, 46%는 반대의 입장을 나타냈다. 양분된 여론을 보이는 가운데 운전을 자제하려는 여론이 근소하게 앞선 상황이다.
자동차 산업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 같은 여론이 조성된 데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국제유가 상승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2월 독일 휘발유 및 경유 가격은 1년 전에 비해 약 26%가 상승했다. 유가 급등에 물가 안정과 경기 회복을 위해 일주일에 한 번은 운전대를 내려놓자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전쟁범죄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죄의식도 '차 없는 날' 캠페인의 확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독일은 석유의 30%를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으로 막대한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하는 등 러시아의 전쟁범죄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인만큼 러시아산 석유에 대한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여론이 동조를 얻고 있다.
현지 언론은 대다수 독일인들은 운전 중에도 러시아에 전쟁자금을 대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이처럼 독일인들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유독 감정적인 동조를 보이는 데에는 2차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던 역사에 철저히 반성하는 국민적 분위기가 배경에 깔린 것으로 해석된다.
석유 사용을 줄고자 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온실 가스 감축을 주요 공약으로 추진 중인 현 정부의 정책 운영에도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 정부는 2020년대 말까지 1990년 탄소 배출량을 기준으로 65% 수준까지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독일은 지난해 7억 6,200만 톤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1990년 기준 39%가 감소한 수치를 보였다. 그러나 2020년 배출량에 비교해선 3,300톤이 증가해 탄소중립 정책에 비상등이 켜졌다.
세부적으로 수송 및 건물 분야에서의 배출량이 목표치를 초과한 반면 산업 및 농업 분야 배출량은 목표치를 넘기지 않았다. 독일 경제부 및 기후부의 수장인 로베르트 하벡 장관은 현 사태에 대한 대응책을 부활절 이전까지 내놓을 계획이다. 수송 분야에서는 차량 전동화에 속도를 높이는 정책들이 제시될 것으로 전망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차량 없는 날' 등의 캠페인이 정착된다면 탄소배출 감소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 정부의 정책이 화석 연료 사용 절감 쪽으로 확실히 기운 것은 아니다. 화석연료 사용에 대한 세금 감면 및 보조금 지급으로 가계 물가 안정화를 꾀하는 정책도 진행 중이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은 휘발유와 경유에 대한 리베이트, 즉 지불금의 일부를 돌려주는 정책을 구상 중이다. 린드너의 리베이트 정책에는 3개월 간 약 66억 유로가 사용될 것으로 추정된다.
녹색당과 사민당 일부 의원들은 리베이트 정책의 형평성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자동차 소유자들에게만 도움이 될 뿐 그렇지 못한 저소득 가구에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하다는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또한 린드너가 제안한 정책에 의문을 제기했다. 한 경제학자는 이같은 환급 정책이 "창밖으로 돈을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며 반대의 뜻을 명확히 했다.
현지 여론 조사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39%가 리베이트 정책을 지지한다고 대답한 반면 절반이 넘는 52%가 그의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또 그의 정책은 정부 세금을 사용해 석유 사용을 활성화시켜 궁극적으로 푸틴의 전쟁자금을 불리는데 기여한다는 비판에도 직면해 있다.
그럼에도 운수업 종사자 등 당장 석유를 사용해야하는 국민들에겐 리베이트 정책과 같은 즉각적인 보상책이 필요해 보인다. 더욱이 러시아가 유럽에 에너지 수입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며 압박을 넣고 있는 동시에 가스관 폐쇄까지 시사하며 전 유럽을 위협하고 있어 현재의 에너지 대란은 더욱 심각한 국면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의원들은 치솟는 에너지 가격이 탄소 사용을 억제해 온실 가스 배출량 감소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현 상황에서 고통받는 서민들을 고려했을 때 즉각적인 가계안정책이 우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독일 정부 역시 운전자 공제를 포함해 올해 총 45억 유로의 세금 감면 조치를 승인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