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전차 단 한 대도 등장하지 않아… 전차는 '고물 전차' T-34 한 대 뿐
현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짧은 퍼레이드… 군사 장비 행렬에 10분도 걸리지 않아
열병식 보안 조치, 전례 없는 수준… 사탕까지 압수해
철수 선언 철회한 프리고진, "뭘 축하하는지 의문" 비판

사진 = 지난 9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전승 기념일 행사의 보병 행렬 / 러시아 외무부 텔레그램
사진 = 지난 9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전승 기념일 행사의 보병 행렬 / 러시아 외무부 텔레그램

[월드투데이 우현빈 기자] 러시아가 과시를 위한 전승 기념일 행사를 열었다가 오히려 러시아군의 심각한 장비 부족 상황을 내비치며 조롱을 사게 됐다.

지난 5월 9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전쟁 개전 이후 두 번째 전승 기념일을 맞았다. 이날 러시아 다수 지역에서는 안보 문제 등을 이유로 열병식이나 거리 행진 등 전승 기념일 행사를 취소했다.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에서 가까운 서부 지역 대부분은 행사를 전면 취소했지만, 수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는 열병식이 진행됐다.

사진 = 열병식에서 연설하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모습 / 러시아 외무부 텔레그램
사진 = 열병식에서 연설하는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의 모습 / 러시아 외무부 텔레그램

러시아는 나치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전승 기념일 열병식을 통해 유럽 등 서방 세력을 현존하는 위협 '신 나치주의'로 규정, 나치 독일과 동일시함으로써 국민들의 애국심과 결속력을 강화해왔다. 그중에서도 수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 앞에 위치한 붉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열병식은 러시아의 최신 군사 기술을 앞세워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진행되어왔다.

하지만 이날 붉은 광장에서 벌어진 열병식은 이전까지의 행사 중 가장 초라하게 진행됐다. 특히 군사 장비의 축소가 가장 컸다. 러시아의 반정부성향 매체 '모젬 오뱌스니치'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열병식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군사 장비 행진조차 "10분도 걸리지 않았다"라고 지적하며, "현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짧은 퍼레이드 중 하나"라고 평했다.

사진 = 이번 열병식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탱크인 T-34의 모습 / TASS통신 / 연합뉴스
사진 = 이번 열병식에서 유일하게 등장한 탱크인 T-34의 모습 / TASS통신 / 연합뉴스

이번 열병식에서는 소형 전술차량인 티그르, 수송트럭 우랄, 고중량 트럭 카마즈, 단거리 탄도미사일 이스칸데르, 대륙간 탄도미사일 야르스, 지대공 미사일 S-400(러시아명 C-400), 장갑차 부메랑이 등장했다. 현대 전차는 한 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궤도차량이라고는 전승절의 기념 대상인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사용했던 '고물 탱크' T-34뿐이었으며, 그조차도 단 한 대에 불과했다.

지난해 5월 축소 진행됐던 열병식에서는 탱크만 해도 T-34는 물론 T-72, T-90, T-14 등 여러 종류가 여러 대씩 등장했고, BTR-MDM, BMD-4M 등 병력수송장갑차(APC)나 BMP-3, BMP-2 등 보병전투장갑차처럼 훨씬 다양한 장비가 등장했던 걸 생각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수였다.

지난해 열병식에서 악천후로 인해 취소됐던 공군 퍼레이드 역시 맑은 날씨 속 진행된 이번 열병식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진 = 열병식 중 보병 대열의 모습. 이날 보병 대열에는 군인이 아닌 사관학교 생도와 군사학과 대학생들이 동원됐다 / 크렘린궁 텔레그램
사진 = 열병식 중 보병 대열의 모습. 이날 보병 대열에는 군인이 아닌 사관학교 생도와 군사학과 대학생들이 동원됐다 / 크렘린궁 텔레그램

이러한 경향은 동원된 인원에서도 나타났다. 작년만 해도 투입된 병사가 11,000명에 달했는데, 올해 열병식에는 당초 발표됐던 1만 명에도 못 미치는 8천 명이 투입됐다. 심지어 보병 행렬에 투입된 것은 군인이 아닌 사관학교 생도들과 군사학과 대학생들이었다.

뉴스위크에 따르면 이번 전승전 열병식에는 아직 러시아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 중인 구 소련의 아르메니아,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티스탄 국가 정상들만이 참여했다.

러시아는 이번 열병식 규모의 축소가 지난 3일 크렘린궁에서 발생한 드론 폭발 사건 이후로 축소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방 전문가들은 이 같은 주장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입은 인적·물적 손실을 숨기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푸틴이 크렘린의 드론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러시아의 반정부 성향 매체 아겐트스트보가 러시아의 경제신문 콤메르산트의 보도를 인용한 바에 따르면, 푸틴은 기자들과의 대화 중 드론에 대해 "와이어 등의 재료로 만들어진 사제 드론에 400g의 TNT를 실은 것으로, 시리아 공군 기지에도 날아든 적이 있다"라며,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날 열병식에서는 전례 없는 수준의 보안 조치가 이루어졌다. 아겐트스트보는 10일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이 지하철에서 내려 관중석으로 가기까지 네 차례의 검문검색을 받았으며, 전자담배나 사탕 등의 물품을 빼앗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모젬 오뱌스니치는 이러한 열병식 분위기 속에 이를 구경하러 온 대중 역시 예년보다 한참 적은 수였다고 전했다. 아겐트스트보는 빈약한 퍼레이드의 내용을 두고 "전승 퍼레이드가 우크라이나 전쟁 2년차에 접어든 러시아군의 피폐함을 보여줬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반면 이러한 열병식의 축소가 러시아의 의도적인 전략에 의한 것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동유럽을 연구하는 류드밀라 이수린 교수는 "(러시아 국민이) 자신들의 아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대규모 군사 기념식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며 "국가가 전쟁 중일 때 웅장한 축하 행사를 개최하는 것은 러시아인의 사고방식과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진 = 전승 기념일 포스터를 보며 이야기하는 프리고진의 모습 / 프리고진 공식 언론 텔레그램
사진 = 전승 기념일 포스터를 보며 이야기하는 프리고진의 모습 / 프리고진 공식 언론 텔레그램

이 같은 열병식에 대해 바그너 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우리가 무엇을 축하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는 반응을 내놨다.

프리고진은 지난 5일 바흐무트로부터의 바그너 그룹 철수를 선언했으나, 이틀 만인 지난 7일 철수 계획을 철회했다. 당시 프리고진은 영상을 통해 "러시아군으로부터 계속 싸울 무기를 약속받았다"라며, "바그너 그룹의 작전에 관한 모든 결정은 세르게이 수로비킨 육군 장군이 내릴 것"이라고 전했다. 프리고진은 수로비킨을 "싸우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장성"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전승 기념일인 9일, 프리고진은 "국방부로부터 바그너 그룹이 요청한 탄약의 10%밖에 지원받지 못했다"라며, "추가 지원이 없다면 바흐무트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 러시아 국방부의 뉴스 화면. '모스크바'라는 검색어로 올해 5월 8일 이후의 뉴스를 검색했지만,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 러시아 국방부 홈페이지 캡처
사진 = 러시아 국방부의 뉴스 화면. '모스크바'라는 검색어로 올해 5월 8일 이후의 뉴스를 검색했지만,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 러시아 국방부 홈페이지 캡처

한편 러시아 국방부는 2013년부터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열병식에 동원된 장비와 인력의 구성을 공개해왔지만, 올해는 이처럼 빈약한 구성으로 인한 논란이 생길 것을 의식한 듯 모스크바에서의 열병식에 관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현재 러시아 국방부 홈페이지는 "비우호국"으로 분류된 국가로부터의 접근이 차단된 상태로, 한국 IP 역시 차단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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