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투데이  이현욱 건축가]  속담 중에 “산 입에 거미줄 치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살림이 어려워 식량이 떨어져도 사람은 그럭저럭 죽지 않고 먹고살아가기 마련임을 이르는 말이다.

같은 뜻으로 “사람이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가 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나름대로 먹고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다.  그럼, 사람이 만약에 혼자 있다면 그럭저럭 죽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지금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 질문에 내 인생을 정말 잘 살았는지, 진정한 친구가 있는지, 날 반겨줄  고향이 있는지,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먼저 세상을 떠나면 아내와 아이들끼리 산 입에 거미줄을 안 칠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있을까?

속담의 배경을 한번 생각해보자. 이런 속담이 가능한 시대의 분위기를 보면 동네사람들이 서로 다 알고 지내면서 살았다. 동네 슈퍼, 세탁소, 미장원도 다 아는 사람들이었다. 옆집도 뒷집도 마을 입구 대추나무집에 누가 살고 첫째 아이가 반에서 반장이라는 것도 다 알고  살았다. 돈이 없으면 동네 슈퍼에서 외상으로 라면을 사다 먹었다.

어렸을 때 엄마의 심부름 중에는 슈퍼에 가서 외상으로 라면 사오기가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동네가 작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서로 알고 지내며 살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집이 어려우면 동네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위로해주면서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들과 산책하다 아이들이 음료수를 사달라고 떼를 쓰면 주머니에 지갑이 있는지부터 확인하게 된다. 만약에 돈이 없으면 “음료수 몸에 안 좋아.” 하고 아이들을 달래 집으로 그냥 돌아온다. 넉살좋게 “돈은 이따 드릴게요.”라고 할 수도 있지만 가게 주인이 아닌 아르바이트 학생이라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가끔 버스정류장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2천 원만 빌려달라고 하는 학생이 있다. 진짜 지갑을 잃어버려서 버스비를 빌려달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속으로 ‘이렇게 열 명이면 2만 원인데 어디서 수작이야?’ 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정 없으면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엄마를 부르는 방법도 있잖아.’ 하면서 내가 안 도와주는 이유를 합리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복잡했다. 다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물론 대도시에 살다보니 그 학생이 초면이라 상황 분석이 어려우므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아는 학생이라면, 아니, 버스에서 한두 번 본 학생이라면 2천 원을 빌려줬을까? 그래도 내 일이 아니니 ‘택시를 타면 되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학생이 택시를 타고 가지 못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다음에 나를 만나 진짜 돈을 같을 생각으로 빌려달라고 한 것일 수도 있다.

땅콩집이 모여 마을이 되고, 마을은 이웃이 있어 좋다.
땅콩집이 모여 마을이 되고, 마을은 이웃이 있어 좋다.

작은 동네에서 다 알고 살다가 대도시로 와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살다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찝찝하다. 이게 대도시의 삶이야, 라고 나를 합리화하는 건 아닌지. 건축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행복한 집’에 대한 정의를 명쾌하게 내릴 수가 없다.

건축과에 들어가면 첫 수업이 주택이다. 유명한 건축대가들의 삶을 보면 주택에서 시작해서 주택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집은 모든 건축가들의 숙제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주택이 가장 어렵다. 특히 누군가가 행복하게 살 집을 설계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 역시 어려서는 주택에 살았지만 초등학교 이후에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때 강남으로 이사를 와서 강남의 발전과 변해가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고속버스터미널이 지어지는 것도, 동네에 아파트가 계속 지어지는 모습도 봤다. 학교 가는 길은 항상 공사장이어서 내가 나중에 건축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집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집도 아파트를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삼아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한 동네에서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이사를 다녔다.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이사를 하면서 집이 조금씩 넓어졌다.

15평에서 18평으로 다음은 같은 평수지만 새 아파트로, 그 다음은 24평, 그 다음 32평. 그렇게 점점 더 비싼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집이 점점 넓어지면서 우리 가정이 더 행복해졌는지는 의문이다.

동네가 익숙해지면 이사하고 동네가 익숙해지면 이사를 해서 다음부터는 앞집 아저씨나 아줌마한테 인사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인사를 하고 알게 되어도 다음 달에 또 이사를 갈 건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 그냥 머리만 숙이는 정도로 인사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많은 건축가들이 아파트 설계에서 커뮤니티를 강조한다. 주택의 모양이나 평수보다도 커뮤니티에 신경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헬스장은 기본이고 관리실, 노인정, 그리고 유치원을 포함한 어린이집도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넣어 좋은 시설을 만들지만 이상하게 아파트 단지는 ‘동네’라는 유대감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헬스장 시설을 같이 이용하지만 굳이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같은 동네에 살지만 우리 ‘우리 동네’라는 커뮤니티 형성은 옛날같지 않다. 어찌 보면 아파트에서는 ‘동네’라는 개념이 불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기자들이 땅콩집을 왜 만들었냐고 질문하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아이들에게 집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아니, 고향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고 답한다. 어릴 때 살던 집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어머니 품 같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물론 예쁘고 멋지고 비싼 집하고는 거리가 먼 초라한 집이었지만 나는 그 집이 좋았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내 나이 황금기 다섯 살 때,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우리 집은 길가에 붙은 작은 단층 집이었다. 평수가 15평 될까? 마당은 한 5평 정도 남아서 잔디는커녕 시멘트 바닥으로 마무리된 볼품없는 집이었다. 그때  기억에 한옥은 확실히 아니고 그냥 벽에 지붕은 양철지붕인지 비오는 날이면 빗소리가 엄청 커서 빈대떡 생각이 절로 나는 그런 집이었다.

그냥 아주 평범한 집들이 모여 동네를 이루고 내 또래의 아이들이 많이 산 기억이 있다. 그런 집들 사이 골목을 점령한 아이들은 모여서 놀고 담벼락에 낙서를 했다. 옆집은 철물점이라 당연히 깡통집, 뒷집은 자주 울어서 울보네 집, 길 건넛집은 만두집이라 잘 먹어서 그런지 아이가 뚱뚱했다.

만두집이 아니고 돼지가 사는 집. 그럼 우리 집은? 우리 집 담벼락에는 아주 크게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똥개. 왜 똥개인지 잘 모르지만 내 별명이 똥개였다. 집에 개도 없었지만 그냥 어느 날 일어나서 나와 보니 누가 담벼락에 똥개라고 쓰고 달아난 거다. 지우면 또 써 놓고 써놓으면 또 지우고 쓰고 다시 지우고를 반복했다. 

한 달 정도 그렇게 지나면서 우리 집은 똥개집이 되었다. 억울했지만 이것이 골목길 아이들의 법이다. 우리 집은 전세라 그런지 부모님은 담벼락에 관심이 없었다. 만약에 집주인이라도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담벼락이 하도 지저분해서 별로 티도 안 났다. 다들 사는 게 바빠 자기 집 담벼락에 뭐라고 써 있는지 관심이 없던 그 시절, 1974년. 그렇고 그런 집들이 오순도순 아등바등 모여 살던 동네는 서울의 홍은동이다.

길 건너에 내 또래의 친구들이 살아 같이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동네 골목대장을 했던 기억과 친구들의 이름은 기억을 못하지만 별명은 아직도 생각이 난다. 대부분이 길가 집이라 가게를 했고, 친구들의 별명은 그 집의 용도와 같았다. 예를 들어 철물점 아이, 고기집 아이, 만두집 아이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 중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는 당연히 만두집 아이였다. 내가 워낙 만두를 좋아해서 그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그 친구 어머님은 우리가 놀러 가면 항상 만두를 지져주셨다. 그때 먹었던 따끈따끈한 고기 만두의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물론 고기는 그 옆집 고기집에서 가져온 거다.

하루 종일 놀다보면 골목길 저편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어렸을 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침에 회사에 출근하시고 저녁에 퇴근해서 들어오실 때 두 손에 무엇인가 항상 들고 오시는 자상한 모습이다.

어느 날은 귤, 어느 날은 붕어빵, 떡볶이, 순대 등 양은 적었지만 참 다양한 먹을 거리를 사들고 퇴근하는 아버지가 늘 반가웠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출근은 안 하시고 나랑 같이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빠 오늘은 출근 안 해?” 
“응 휴가야, 오늘은 뭘 하며 현욱이랑 놀아줄까?” 
“휴가? 회사를 안 가면 퇴근할 때 사오던 먹을거리는 없잖아?” 

결국 아버지의 장기 휴가는 실직으로 이어지고 아버지의 실직으로 어머니가 옷가게를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 이거 뭐야? 우리 집 이제 옷가게야? 이거 파는 거야?” 
그냥 거실에 옷을 걸고 대문에 옷가게 간판을 걸고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는 편물도 시작하셨다. 언제 배우셨는지 모르지만 모자에 스웨터에 못 만드는 옷이 없었다. 

진짜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말이 딱 맞아떨어졌다. 가게를 얻을 돈은 없고, 살고 있는 집이 가게가 된 것이다.  나의 별명도 ‘똥개’에서 ‘옷집 아이’로 승격했다. 친구들은 나름 나를 부러워했다. 동네의 패션을 선도하는 사람으로 나는 항상 신상 옷을 입었고 동네의 광고판 역할을 했다. 옷이 새 거라 노는 것도 조심스러워 자연스레 행동도 어른스러워졌다. 나는 친구들과 달리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어머니의 옷가게는 2년을 유지했고 아버지의 취직으로 옷가게는 다시 정리됐다 . 집 대문에 걸었던 간판도 없어지고 우리 집은 더 이상 옷가게가 아니었지만 나의 별명은 계속 옷집 아이로 남았다. 그 당시 나의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는데 그 이후 꿈은 계속 변해서 결국 건축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아이들에게 줄 순대를 손에 들고 퇴근을 한다. 아이들은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항상 반갑게 맞이한다. 말은 ‘아빠 왔어?’이지만 눈의 방향은 늘 손으로 향한다. 
“아빠 손에 든 거 뭐야?” 
“응 네가 좋아하는 순대야!” 
“와 아빠 최고다.” 
산다는 게 이런 거 아닐까?

◆ 이현욱 건축가 

-現 이현욱좋은집연구소 대표

-캐나다 정부와 집짓기 프로젝트 시행

-땅콩집 열풍 전국 확산 (MBC 방송 출연)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 기업혁신 부문)

-언론사 선정 올해를 빛낸 인물(2010년)

-화제의 논픽션 작가 선정((2011년)

-<두 남자의 집짓기>(2011년), <나는 마당 있는 작은 집에 산다>(2013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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