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투데이  이현욱 건축가]  우리 집에는 좋은 아빠되기 6계명이 있다. 냉장고 문짝, 화장실 거울에 아이들이 종이에 적어서 붙여 놓았다. 목이 말라 물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어도 양치질할 때도 좋은 아빠되기 6계명을 꼭 봐야만 한다.

물론 우리 가족이 회의를 통해 만든 것이지만 전적으로 아내와 아이들의 작품이다. 그나마 내가 거부권을 행사해서 10가지가 6가지로 줄었다.

1. 하루에 한 번 사랑한다 말하기.(이건 거저먹는 거라 오케이.)
2. 아이에게 하루에 두 번 전화하기.(이것도 뭐 별 무리 없다고 생각.)
3. 하루에 책 3권 읽어주기.(조금은 힘들지만 1, 2번이 쉬우므로 동의.)
4. 하루에 30분 놀아주기.(10분으로 조정을 요구했지만 아이들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인정. 우리 딸의 강력한 반대의 말 “10분 가지고 뭘 해?”)
5. 하루에 한 번 안아주기.(30분 놀아주기로 타결이 되자 서비스 차원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봐줬다며 하나 추가.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하루에 30번도 안아준다. 특히 여보 내가 매일 안아줄게!)
6. 1주일에 2번 목욕시키기.(30분 놀아주기 다음으로 힘든 일이지만 예전에도 가끔 했던 일이라 쿨하게 오케이!)

두 달 동안의 결과는 참패다. 하루에 두 번 전화하기. 한 번은커녕 두 달 다해서 두 번 했나? 그것도 아내가 전화 안 한다고 해서 한 거였다. 하루에 한 번 사랑한다 말하기? 미안한 얘기지만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책 3권 읽어주기는 딸아이가 꼭 챙기는 거라 하는 수 없이 했지만 1주일에 이틀 정도 실천했다.

사진=이현욱 건축가
사진=이현욱 건축가

하루에 한 번 안아주기도 바쁘다는 핑계로 1주일에 한 번이나 했을까? 그것도 술 먹고 아이들 자는데 볼에 뽀뽀하는 정도다. 어려서 기억에 나의 아버지가 술 먹고 얼굴에 뽀뽀하는 게 가장 싫었는데 우리 아이들도 술 냄새 난다고 다 싫어한다. 

아내는 화가 났고 급기야 좋은 아빠되기 10계명 때문에 이 일로 부부싸움이 났다. 냉장고와 화장실에 붙여 놓은 쪽지는 사라지고 좋은 아빠되기 6계명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남들에게는 ‘행복하게 사세요, 집을 지으세요, 가족의 소중한 집을 지어서 행복하게 사세요’ 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정작 나의 가족에게 나는 어떤 존재인가? 땅콩집은 많은 사람들에게 집에 대한 희망과 꿈을 전해줬으며 땅콩집 건축가 이현욱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아파트를 벗어나 누구나 쉽게 마당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준 영웅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가 영웅인가? 우리 아이에게 하루에 한 번 사랑한다는 말도 못 해주는 영웅? 아니면 아이들과 30분도 못 놀아주는 영웅? 아내가 나에게 한 말이 자꾸 생각이 난다. 

“나는 영웅은 필요 없어. 아이들과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아빠가 필요해.”  우리 가족에게는 영웅보다 함께 놀아주는 아빠가 필요한 것이다.  돈을 많이 벌고, TV에 자주 나오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땅콩집 건축가보다 그냥 평범한 아빠가 필요한 것이다. 

그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한 편의 영화와도 같은 아주 무서운 꿈이었다. 꿈속의 나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었다. 손은 쭈글쭈글하고  얼굴의 주름으로 봐서는 일흔 살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머리는 거의 빠지고 남아 있는 머리카락도 하얗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정말 이 모습으로 오래 산 사람처럼 친근함까지 느껴졌다.

그 노인 앞에 한 여인이 서 있다. 모습은 분명 아내다. 그런데 이 여자는 나더러 아빠라고 부른다. “아빠가 해준 게 뭐가 있어요? 왜 내 인생을 더 비참하게 만드세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해요.”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걸 보니 분명 딸 은세다.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죽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나의 몰골이 마치 아내 없이 오래 산 홀아비 꼴이었다. 아내는 항상 아침이면 그날 입을 옷을 챙겨주었는데 꿈속에서 내가 입고 있는 셔츠랑 바지 색깔이 내가 봐도 영 이상하기 짝이 없다

“은세야! 다 너를 위해 아빠가 그러는 거 아니니? 그 남자는 안 된다. 이 세상에 많은 남자 중에 왜 하필 그 놈이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는 너를 위해 인생을 다 바쳤다.”  딸의 어깨를 잡고 설득해보지만 딸의 얼굴을 보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빠가 저한테 뭘 해줬는데요? 내가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 아빠가 필요할 때 아빠는 없었어요. 아빠는 돈 버느라 평생을 허비했어요. 그래서 엄마가 떠난 거예요. 아직도 모르세요? 인생에는 성공이, 돈이 중요한 게 아니고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구요. 그 사람은 능력은 없지만 나를 사랑하고 내가 필요할 때 내 옆에 있어줄 사람이에요. 아빠보다 백 배 좋은 사람이에요. 욕하지 마세요.” 꿈속에서 아내와 나는 아마 이혼을 했나 보다. 

‘그래, 지금이 소중해.’  “은세야, 아빠가 대학도 보내주고 예쁜 옷도 사주고 독립한다고 해서 모자라는 전세 돈도 보태주고 이렇게 열심히 사는 아빠에게 가슴에 상처를 주는 얘기를 하니? 이번만은 아빠 말 들어.”  대화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딸 은세는 집을 뛰쳐나갔다. 나는 다리가 아픈지 쩔뚝거리면서 쫓아가 보지만 딸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뒤를 돌아서 집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아니 이럴 수가? ‘옆집이 없다.’ 왼쪽에 우리 집은 있는데 오른쪽 친구 집이 없다. 집이 통째로 사라지고 바닥 콘크리트만 남아 있었다. 바닥을 보니 예전에는 집이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내가 만든 땅콩집. 이제는 내 모습과 같은 초라한 집 한 채뿐이다. 그 모습에 놀라 “안 돼!”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삼류 드라마 같은 꿈에서 깨어난 나에게 아내는 무슨 일이냐고, 무슨 꿈이냐고 물었지만 미친개한테 물리는 꿈이라고 둘러댔다.다음 날 아침 일어나서도 간밤의 꿈이 자꾸 생각이 났다. 아이들에게 달려가 오늘 일찍 집에 들어와 30분, 아니 1시간 놀아준다고 다짐을 했다. 아이들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중학생만 돼도 친구랑 놀지 부모랑 놀지 않는다. 그때 가서 놀아준다고 난리를 쳐도 소용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자. 돈은 다음에 벌자. 지금 당장 아이와 30분 놀아주기가 더 중요하다. 그날 저녁, 회사에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다락방에 올라가 30분을 놀았다. 그냥 다락방에서 셋이서 빙글빙글 돌았다. 아이들은 도망가고 나는 쫓아가고. “아빠는 좀비다 너를 잡아먹겠다.” 하면서 손을 들고 입을 벌리고 쫓아다닌 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이들은 너무 행복해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아들과 딸은 깔깔거리며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소소한 행복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 생각한 ‘아이들과 30분 놀아주기’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 이현욱 건축가 

-現 이현욱좋은집연구소 대표

-캐나다 정부와 집짓기 프로젝트 시행

-땅콩집 열풍 전국 확산 (MBC 방송 출연)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 기업혁신 부문)

-언론사 선정 올해를 빛낸 인물(2010년)

-화제의 논픽션 작가 선정((2011년)

-<두 남자의 집짓기>(2011년), <나는 마당 있는 작은 집에 산다>(2013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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