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2년 출생, 1799년 사망...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독립전쟁 영웅이자 세계 최초 대통령
훌륭하게 끼운 첫 단추만큼 돋보였던 마무리

[사진=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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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 PRESIDENTS WHO MADE AMERICA GREAT

[월드투데이 전유진 기자]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에는 세계 최대의 조각품이 있다. 바위산 자체를 조각한 것으로 현재의 위대한 미국을 있게 한 네 명의 대통령 얼굴을 담았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 주인공이다. 4명의 대통령이 어떻게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그 삶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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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달러 지폐의 얼굴

미국 1달러 지폐를 보면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가 있다. 무려 200년 전인 1811년부터 1달러에서 그를 찾아볼 수 있었는데,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이 조지 워싱턴을 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조지 워싱턴에게 미국은, 미국에게 조지 워싱턴은 어떤 존재일까?

◆ 전쟁영웅, 초대 대통령, 세계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다양하며 하나 같이 대단한 업적들이다.

미국의 정치가인 그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군인이며,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다. 동시에 미국의 건국 아버지이며 대륙군 총사령관으로서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다.

또한 헌법제정회의에서 새로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 권한을 강화했으며 국내 여러 세력의 단합과 헌법의 실현에 힘썼다. 그는 막 출발기로에 선 미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가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씩 짚어보았다.


◆ 출생

조지 워싱턴은 1732년 버지니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인 워싱턴 가문은 잉글랜드 북동부 타인위어에 위치한 워싱턴 출신이다. 조지 워싱턴의 증조부인 존 워싱턴 대에 1656년 영국을 떠나 버지니아에 정착했다. 당시 담배를 주로 경작하는 큰 농장을 운영했다.

◆ 청년 시절의 조지 워싱턴

부유한 지주의 아들이었으나 워싱턴은 독학으로 토지측량관이 되었다. 광활한 토지에 대한 측량 업무가 중요했기에 18살에 측량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는 군인에 대한 로망도 가지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이 11살일 때 아버지가 질병으로 사망하여 그의 이복 형인 로렌스가 가장이 됐다. 로렌스는 버지니아 민병대의 지휘자였으며 로렌스에게 교육을 받았던 조지 워싱턴도 군인의 꿈을 키웠다. 그는 추후 버지니아 민병대에 지원하여 대령의 계급으로 근무했다. 미국에서 연공서열이 제일 높은 군인인 조지 워싱턴의 군대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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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군 장교 생활

1752년 이복형이 죽자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직을 이어받았다.

1753년 조지 워싱턴은 오하이오 회사라는 개척회사의 대리인 자격으로 오하이호 강 지역에 파견되는데, 이때 프랑스와 충돌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버지니아에서 영국군 소령 직위를 받았고 이렇게 워싱턴은 영국군에 입대한다.

그후 2년 뒤인 1754년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중령 직위로 버지니아 의용군을 이끌고 참가했다. 애팔래치아산맥 서쪽의 땅이 프랑스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을 반대한 때문이었다. 이후 10개월 동안 인디언과 벌어진 20번의 전투에서 연대 병력의 1/3을 잃는 등 격렬한 전쟁을 지휘하였으며 1758년 퇴임하였다.

워싱턴에게 영국군 장교 시절과 프랑스-인디언 전쟁 참전 경험은 훗날 독립전쟁을 이끄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된다. 그는 영국군의 군사 전술과 장단점을 파악할 수 있었고, 군 조직 군사 교육 및 훈련, 군수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또한 이때부터 수하들의 신뢰를 얻었다.


◆ 결혼

1759년 퇴임한 워싱턴은 마사 커스티스와 결혼하며 당대 미국 최대 갑부 중 한 명이 된다. 당시 마사는 광대한 농장주였고 매우 부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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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에 입문한 조지 워싱턴

군인의 길을 포기한 워싱턴은 정치에 도전했다. 그는 1759년 버지니아 주의 하원의원이 되어 정치계에 입문하였다.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워싱턴은 영국 정부의 부당한 식민통치에 반기를 든다.

영국정부는 식민지 전쟁에 많은 예산과 국력을 소모해 이를 메꾸려고 식민지에 세금을 늘렸다. 더불어 새로 편입된 식민지의 원주민을 다독이기 위해 식민지인의 구 프랑스 식민지 지역으로의 개척을 금지시키자, 그동안 쌓인 불만들이 폭발하여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한다.

◆ 독립 전쟁

1774년 제2차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새로 창설하기로 한 대륙군의 총사령관에 선출됐다. 사령관에 임명되었지만 군대의 실체는 없었다. 각 주마다 새로 병사들을 모집하고 무장해야 했다.

조지 워싱턴의 어깨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훈련받지 못한 군인들과 무기와 군수물품의 부족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세계 최강의 영국군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1776년 7월 4일 워싱턴은 대륙회의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독립선언서를 확인한 워싱턴은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읽어준 후 말했다.

 

여러분,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싸우십시오.

이 나라의 평화와 안전은 하느님이 보호하고 계십니다.

1777년 영국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프랑스, 네덜란드의 지원도 추가됐다. 

1781년 10월 요크타운 전투에서 워싱턴은 찰스 콘월리스가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 냄으로써 전쟁을 종결시켰다.

워싱턴은 1783년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자 군대를 해산시킨 뒤 군의 통수권을 반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왕이 되어 달라는 국민의 성원이 있었지만 그는 과감하게 욕심을 접었다.

백악관을 짓고 있는 모습과 조지 워싱턴 [사진=pixabay]
백악관을 짓고 있는 모습과 조지 워싱턴 [사진=pixabay]

◆ 초대 대통령 취임

그러나 미국은 여전히 조지 워싱턴이 필요했다. 각 주의 영향력이 강하고 연합회의가 무력했던 것이다. 기존의 연합규약을 넘어 주들을 한 나라로 단결시킬 헌법이 필요했다.

이에 1787년 헌법제정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워싱턴은 의장을 맡았다. 1787년 9월 17일 총 7개조로 이루어진 미국 헌법 초안이 완성되어 13개 주가 비준을 완료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연방국가 미합중국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헌법에 의하여 1789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같은 해 4월 30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만장일치로 선출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워싱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 세계 최초 대통령이 되다

워싱턴 대통령의 취임은 세계 역사의 새로운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세계사에서 최초로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가 국가 원수가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인도의 바이샬리에서 민주적 공화정이 실시된 적이 있지만, 규모가 작은 도시국가에 한한 것이었다.

워싱턴의 취임은 대통령 중심제로 대표되는 현대 정치의 출발이었다.

◆ 미국인이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생각한 이유

미국은 조지 워싱턴 같은 리더십을 원하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독단적이지 않았고, 주위의 의견을 듣고 포용할 줄 아는 겸손하고 신중한 정치인이었다. 게다가 정직하고 도덕적이었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원칙을 저버리지 않는 굳센 의지의 소유자였다.

만약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실시된 대통령제가 성공하지 못하면 봉건적 왕정이 오히려 옳았다고 판명될지도 모르는 일, 그의 행보가 중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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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워싱턴의 업적

결론적으로 조지 워싱턴은 미국 국민의 기대에 부합하며 미합중국의 기로를 성공적으로 닦았다.

그는 합리적인 행정부를 구성하여 공명정대한 인사권을 발휘했다. 오직 능력에 따라 재무장관에는 알렉산더 해밀턴, 국무장관에는 토마스 제퍼슨, 전쟁장관에는 헨리 녹스, 법무장관에는 에드문트 랜돌프를 임명했다.

외교적으로는 중립노선을 선택하며 적을 만들지 않았고, 국립은행을 창설하고 위스키 제조업자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등 단호한 재정 정책으로 국고를 튼튼히 했다. 그리고 인구주택총조사와 토지-부동산 총조사 시행이란 업적도 남겼다. 해당 인구주택총조사 방식을 21세기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2번의 임기의 기원

2번의 임기가 끝나자 워싱턴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미국 법 어디에도 대통령직은 2번까지만이라는 말이 없었지만, 워싱턴이 2번만 하고 물러났다.

이가 일종의 관례처럼 굳어져서 워싱턴 이후의 미국 대통령들도 2번 넘게 대통령직을 하지 않고 1선과 2선에 한해서만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그러다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4회 연임을 한 뒤에 1951년에야 법으로 4년 중임제가 명시됐다.

◆ 마무리가 아름다웠던 그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퇴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특히 조지 워싱턴은 2번의 임기 후에도 여전히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또한 세계 최초의 대통령이었기에 전례가 없는 대통령직을 사실상의 봉건국가 왕처럼 인식하는 분위기도 꽤 강했다. 그럼에도 그는 임기기간을 마치자 자발적으로 물러났다. 

그는 재선은 수락했지만 3선은 파멸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음을 직감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기가 6개월 남은 1796년 9월 17일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고별연설'을 발표했다. 일간신문에 발표된 그 연설에서 조지 워싱턴은 아래와 같이 이야기했다.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수 세대에 걸친 선조들과

이 땅에 뜨거운 애정을 느끼면서,

나는 은퇴 후에 누리고자 스스로 다짐했던 생활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해봅니다.

러시모어산의 워싱턴 얼굴 [사진=unsplash]
러시모어산의 워싱턴 얼굴 [사진=unsplash]

◆ 평화로운 권력이양,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대의민주주의

조지 워싱턴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8년의 임기를 원만하게 보냈고 220년이 훨씬 넘은 현재까지도 미국 정치에서 지켜지고 있는 평화로운 권력이양(Peaceful Transition)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1797년 3월 4일 워싱턴은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그의 선택은 후대의 모범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좋은 본보기가 됐다.

또한 평화로운 권력이양을 미국의 정치적 전통으로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미국이 건국 이래 독재자나 쿠데타 없이 민주주의를 지속적으로 펼 수 있었던 것은 조지 워싱턴의 공이 매우 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조지 워싱턴의 좋은 선례덕에 미국은 세계 역사상 최초로 시도한 모험인 대통령제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킬 수 있었다.

또한 워싱턴은 지금도 많은 미국인들로부터 최고의 대통령 중 한명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 청렴을 중시한 워싱턴

한편 워싱턴은 매우 청렴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미국이란 신생국 정부가 뇌물이 오가는 부패한 공무원들로 채워져서는 안된다며, 의회에 요청해 청탁금지법을 만들었다.

국가직, 지방직, 의회 공무원을 불문하고 공무원과 배우자에 대해서는 공무원이 속한 정부 부처에서만 선물을 받을 수 있고, 그 외에서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 자체를 금지시켰다.

조지 워싱턴 본인부터 대통령직에 있는 기간 동안에는 타 정치인이나 민원인들로부터 각종 선물을 모두 거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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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싱턴의 마무리

워싱턴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지 2년만인 1799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1799년 2월 자필로 긴 유언장을 작성한 워싱턴은 그 해 12월 14일 "죽은 후 사흘이 되기 전에 묻어주오"라고 부탁한 후 세상을 떠났다.

워싱턴의 공식 사인은 '과다출혈'이다. 워싱턴은 눈 내리는 날 무리하게 말을 타고 산책하다가 폐렴에 걸렸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무리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피를 뽑았다. 결국 약 2.35리터의 피를 뽑은 워싱턴은 폐렴에 걸린 지 3일만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그의 유언장에는 "개인 시중을 든 윌리엄을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하고 그에게 연금 30달러를 줄 것이며, 아내가 죽으면 나머지 노예들도 해방시켜 달라"는 항목이 포함돼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처음을 일궈낸 독립운동가, 첫 발걸음을 잘 뗀 초대 대통령이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뒷마무리가 돋보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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