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 김상옥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월드투데이 안나현 기자]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 김상옥,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서 총을 놓지 않았다.

김상옥

동대문 종로 효제동에서 태어나 잘나가는 사업가로 승승장구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대장간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 말편자 (말발굽)을 만들어 사업적으로 대박을 치게 된다. 또한 단발령으로 잘린 머리를 수치스러워했던 당시대 분위기에 맞게 말 꼬리털로 만든 말총 모자까지 히트를 치며 사업적으로 남부러울 게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사진= EBS Learning 유튜브 캡처]
[사진= EBS Learning 유튜브 캡처]

 

그러나 1919년 3.1운동을 통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김상옥은 직원들과 함께 만세 행렬에 참석했으나 어린 소녀가 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팔이 잘리고 장검에 찔려 죽는 장면을 목격하며 낮에는 사업가, 밤에는 비밀 신문을 만들어 해외로 상황을 보고하는 일을 시작한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밀정의 레이더망에 걸려 종로 경찰서에 끌려가 40일간의 고문을 겪게 되며 그는 자연스레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총독 암살계획

그러다 미국 국회의원이 오는 날 일본 총독이 마중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일본군은 예상되는 인물을 미리 구속하는 예비검속을 실시했고 김상옥 역시 대상자였다.

다행히 김상옥은 사라졌으나 집안에 숨겨둔 총독 암살 계획이 들키게 되어 김상옥이 없는 재판장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한편 김상옥은 상해로 넘어가 독립운동가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만나 거사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동지 장규동은 2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뜨고 김구가 쥐여준 장례비 100원으로 김상옥은 동지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장례식 준비가 아닌 일본 군사 죽이기를 결심하며 총을 구매한다.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종로 경찰서 폭탄

조선총독부 총독이 일본 가는 열차를 타는 날 남대문 역(현 서울역)에서 총독 처단을 계획하고 현장 답사와 동선 체크를 마친다.

하지만 상해에서 대형 폭탄을 받지 못해 소형 폭탄 사용을 생각하지만 이는 불발 위험이 높았기에 테스트를 위해 거사를 닷새 앞두고 종로 경찰서로 폭탄을 터뜨렸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독립항쟁을 억압하는 총본부로 아주 고약한 고문 기술자들이 거주했다. 물건값을 깎아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장 상인을 때려죽이기까지 했던 악랄한 일본군이 거주했으며 이러한 총독부를 공격한다는 것은 일본군 입장에서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 후 생각보다 빠른 수사망에 그는 남산 덤불 속에 숨어 들어가게 되었고 노출되지 않은 동지의 집에 갔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1:1000 김상옥 한명을 위한 일본군 1000명

밀정에게 걸리게 되고 거사를 앞둔 김상옥은 일본군 경찰 1000명을 둘러싸 마주하게 된다. 

온 집안에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또 사라진 김상옥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수색하던 순간 경찰이 하나 둘 죽어나간다.

사방이 조용해진 순간 변소 안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리고 김상옥의 어머니가 문틈을 여는 순간 그는 양손에 총을 쥐고 세상을 떠났다.

절명한 그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두 눈을 뜨고 이를 악물었으며 양손의 권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동상에 걸린 발가락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가 없는 상태였으며 그 모습은 김상옥의 어머니가 눈앞에서 본 것이다.

11탄의 총 발을 맞았고 그중 한 발은 마지막 순간, 자신을 향해 김상옥이 쏜 것이다. 그는 상해를 떠나오기 전 동지들에게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자격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라고 전했다.

지금에서야 독립운동가의 자손과 집안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무 자랑스럽고 대단한 존재지만, 사실 당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매우 처참하고 말로 이루어 설명하기 힘들 만큼 그들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김상옥의 아들은 20대에 병으로 요절했으며 딸은 심각한 대인 기피증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그렇기에 독립운동가들은 자신의 가족과 동지에게 피해가 갈까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고 철저했다.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사진=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

그가 남긴 메시지

하지만 김상옥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진 한 장을 남겼다. 

뒷짐진 두 손은 나라를 위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부끄러워 숨긴 것이라 전해진다.

아마 그들은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의미보다 독립을 위해 간절했던 그들의 마음을 기억해달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진=대한민국정책브리핑]
[사진=대한민국정책브리핑]

현재 서울 종로역 8번 출구 한쪽에는 표지석 하나가 있다. 김상옥 의거 터이다.

그는 그곳에서 조선총독부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나라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한다.

종로역 근처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종로 5 효제동 김상옥 의거 터' 정류장이 있다. 정류장 뒤편 외딴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마지막까지 싸우던 곳이 나온다.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순국했다. 하지만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장소 보존을 못하는 상황이다.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목숨을 기꺼이 걸었던 그들의 희생정신에 감사하며 우리는 독립운동가 김상옥을 기억해야 한다.

뛰어난 총 솜씨로 쌍권총을 구사하며 일본군에게 큰 걸림돌이 되어준 김상옥 의사를 생각하며 오늘 하루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나라에 대한 소중함을 느껴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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