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드리야르의 '하이퍼리얼리즘'
네오의 전달책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
감독이 관객에게 전달하고픈 메세지는 무엇인가

[사진=매트릭스 포스터,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월드투데이 김지현기자] 매트릭스가 돌아왔다. 제목은 '매트릭스 4: 매트릭스 리저렉션'. 말 그대로 시리즈의 리저렉션(부활, Resurrections)이다. 

매트릭스는 사이버펑크를 대표하는 영화로 손꼽히는 시리즈다. 20세기의 끝과 21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세기말(1999년), 첫 편이 개봉하여 대서사시의 서막을 알렸다.

인간이 AI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AI가 인간을 배터리로 사용한다는 디스토피아적 설정을 보여준다.

이번 기사는 매트리스의 입문서, 소위 '입덕(어떤 것을 좋아하게 됨)'을 겨냥하여 매트릭스1에 나온 이스터에그를 다뤘다.  

네오의 전달매체,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

'이스터에그(Easter Egg)'란 부활절 토끼가 달걀을 숨기듯이 프로그램 내에 사용자가 모르게 장난을 친다는 뜻이다.  이 개념은 의미가 확장되어 현재는 영화나 음반, 서적 등 각종 미디어에서 제작자가 숨겨둔 내용을 총칭한다.

이는 매트릭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주인공 네오의 전달수단으로 쓰이는 책에서다. 

극 중 주인공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밤에는 '네오'라는 이름으로 컴퓨터 해킹을 하며 살아간다. 

​[사진=네오가 자신의 전달책을 보는 모습,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해킹의 전달책으로 이용되는 서적은 제목부터 어려운 '시뮬라르크와 시뮬라시옹(simulacres&simulation)'으로,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집필했다.

[사진=전달책을 열면 완성한 파일과 돈이 들어있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이는 우연이 아닌 감독의 철저한 계산 하에 있는 이스터에그다. 실제로 영화를 감독한 워쇼스키 남매가 매트릭스의 구상을 하는 데 있어 보드리야르의 철학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음을 밝혔다.

[사진=장 보드리야르, 칼스루에]

장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거장이다.

그는 '시뮬라르크(simulacres)' 개념을 주창했는데, 간단하게 말해 시뮬라르크는 '진짜를 뛰어넘는 가짜'를 뜻한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르크를 미키마우스로 설명했다.

미키 마우스는 쥐를 모델로 한 파생실재다. 미키마우스는 사실상 쥐와 별개의 존재로 오히려 원본보다 더 가치있게 여겨진다. 사람들은 하수구 속의 쥐는 싫어하지만 미키마우스를 싫어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대중문화가 장악한 현대사회에서는 원본보다 복제품이 더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경우가 흔하다"며, "이로 인해 현대인의 삶 자체가 허상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실제로는 이렇게 숫자로 구성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임을 인지한 주인공의 시점, 워너브라브라더스 코리아㈜]

감독은 시뮬라르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영화에 그대로 가져왔다. 이는 영화의 배경 자체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알고 보니 AI의 철저한 프로그램 하에 놓인 시뮬레이션이라는 게 영화의 배경 설정이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를 통해 현재의 세상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음을 자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된다.

가짜 스테이크, 그리고 하이퍼리얼리즘

[사진=사이퍼가 스테이크를 보면서 스미스 요원에게 이건 가짜라고 말하는 장면,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위에서 언급한 비판적 시각을 잘 드러낸 장면은 배신자 사이퍼가 스테이크를 써는 씬이다. 사이퍼는 스테이크를 집어들며 스미스 요원에게 말한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이걸 내 입속에 집어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다 이게 즙도 많고 맛있다고 신호를 보내 주는 걸 알고 있다고. 9년이 지나고 나서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무지가 곧 행복이라는 거야.

스테이크로 보여주는 시뮬라르크, 즉 가짜의 우세는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는데, 가짜가 진짜보다 더 실제처럼 인식되어 진짜를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현재 우리의 삶에서도 일상으로 뿌리내린지 오래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가상인간이 큰 팔로워를 지니고 가상모델 '로지'가 신한 라이프 광고를 꿰찬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한 현대사회다. 이는 미술계에서는 1960년대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사진=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이미지의 반역',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하이퍼리얼리즘은 미술계에서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사진이나 실물처럼 극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데 이게 베껴 그리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비평이 항상 따라다닌다.  

이러한 비평을 작품으로 탄생시킨 게 위의 그림이다. 초현실주의 미술가인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는 담배파이프를 그려놓고는 아래에 이렇게 적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사진=네오의 앞에 놓인 선택으로 빨간약은 불편한 진실을 파란약은 편한 가짜를 의미한다,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진짜 같은 가짜'에 대해 계속해서 비판적 성찰이 붙는 예술계와는 달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색을 찾아볼 수 없다. 인스타그램 속 가상인간의 팔로워가 폭발적으로 느는 게 이를 증명한다.

가상인간만이 아니다. 인스타그램에 계속해서 올라오는 꾸며진 일상, 연일 터지는 조작 사건이야말로 가짜가 아니면 무엇일까.

감독은 가짜에 대한 경계가 무뎌진다는 것은 허상들 속에서 허우적되는 세상을 더 빨리 초래할 뿐이라고 말하고자 한 것이다. 

영화의 배경 설정은 이제 현실에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해 보인다. 메타버스를 보고 있으면 가상현실에 접속해 하루를 사는 것이 조만간 일상이 될 듯하다. 

요즘 메타버스로 몰리는 주식자본과 기업들은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전혀 없는듯하다. 감독의 궁극적 의도는 이러한 세상을 영화 속에서 디스토피아적으로 구현해냄으로써 관객에게 반감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매트릭스의 이러한 배경설정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니체가 던졌던 질문과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이는 다음 편에 또 다른 이스터에그와 함께 돌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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