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생애
콜럼버스의 1~4차 항해

[월드투데이 이하경 기자] 콜럼버스는 1405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생애 대부분을 바다에서 보낸 탐험가로,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유럽에 최초로 알린 인물이다.  

콜럼버스의 생애

[사진= 콜럼버스]
[사진= 콜럼버스]

출생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출생 연도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오늘날에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출생하였고,1450년 생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항해 이전에 그는 지중해에서 선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중세 유럽에서도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그는 지구가 둥글다면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간 세계를 한바퀴 돌아 중국과 인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으며, 지중해를 점거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거치지 않고 교역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후원자를 찾다

실현이 불가능한 발상은 아니었으나, 대서양과 태평양을 지나 아시아까지의 거리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계산 실수를 해 지구의 둘레를 실제의 3/4로 생각하고 이 루트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후원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는 영국, 포르투갈, 프랑스에 여러번 후원을 요청하였지만 번번이 거절만 당하다. 

이는 그가 요구했던 조건이 꽤나 까다로웠기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족의 칭호인 '돈'과 제독의 계급을 요구했다. 또한 새로운 땅에서 얻은 수입의 10%를 원했고, 모든 무역 거래의 8분의 1을 자신의 지분으로 하고, 그가 발견한 땅이 식민지가 될 경우 자신을 총독으로 임명해 달라고 말했다. 

동시대에 살던 마젤란의 요구가 보물 5% 양도 및 기록에 대한 저작권 요청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꽤나 과도한 요구였다. 

에스파냐의 후원과 항해의 시작

여러차례의 도전 끝에 그는 마침내 에스파냐의 후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가 제시한 조건을 승인하는 '산타페 협약'을 체결한다. 그녀는 콜럼버스에게 선박 2척(판타호와 니나호)을 내주었고, 선원이 모집되지 않자, 과거의 모든 죄를 면죄하여 준다는 조건으로 감옥에 있던 죄수들을 선원 모집에도 협조해준다. 

1492년 8월 콜럼버스는 산타마리아호, 핀타호, 니냐호로 망명된 카라벨 선 세척에 120명의 승무원을 승선시킨 후 스페인의 파로스 항을 출항한다. 이는 유럽 대륙에서 서쪽으로 항해를 시도한 최초의 선단이었다.

그들은 아직까지 미지의 '검은 바다'였던 대서양으로 향한다. 대서양을 횡단하며 오랜 바다 생활에 지친 선원들의 폭동 문제와, 낮게 드리워진 구름을 육지로 착각하는 등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금방 육지가 나타날 것이라는 콜럼버스의 말과 다르게 육지가 보이지 않자, 선원들은 더욱 더 거칠어진다. 콜럼버스의 9월 24일 항해 일지에는 "육지가 나타날 조짐이 보이는데도 현재 나와 선원들의 관계는 심각한 상태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항해의 목적

콜럼버스가 탐험을 시작한 이유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아니었다.

그는 각종 향신료와 수입을 위한 인도의 교역으로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항해 일지의 90% 이상에서 금과 보물에 대한 언급이 적혀 있었으며, 이사벨 여왕과의 계약 속에서도 부의 축적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것을 볼 수 있다.

4번의 항해 

콜럼버스는 총 4차례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를 한다.

1차 항해

제 1차 항해는 1492년 8월 3일이었다. 콜럼버스 일행은 배가 출항한지 2개월이 지나 지금의 바하마 제도 가운데 한 섬에 도착한다. 감격에 겨웠던 콜럼버스는 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섬의 이름을 '신살바도르(구세주의 섬)'이라고 붙인다. 

이어서 그는 오늘날의 아이티에 도착해 이곳을 인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그 섬의 이름을 '에스파뇰라(스페인)', 원주민을 인디언이라 칭하였다. 인도에 도착했다고 확신한 콜럼버스는 이때부터 원주민들에게 황금과 향료가 출토되는 지역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자 하였다.

콜럼버스는 그곳에서 이국적인 아름다운 풍광, 총 천연색 바닷물고기를 보고 온갖 진귀한 것들을 발견하지만 금광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던 와중에 크리스마스 날 밤 산타마리아 호가 파손되 약 40명의 선원을 에스파뇰라에 남겨 그 땅을 다스리게 한 후 급히 귀향길에 오르게된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 왕과 여왕에게는 미리 '그 땅에 향료가 많고 금광과 여러 종류의 광산이 많다'는 내용의 거짓 서신을 보낸다. 때문에 콜럼버스가 1493년 3월에 귀국하자 에스파냐 여왕은 그를 '신세계'의 부왕으로 임명했고, 그가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약간의 금은 전 유럽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2차 항해

2차 항해에는 1493년 9월 24일 출항한다. 두 번째 항해에는 17척의 배와 1500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이 꾸려졌는데 첫 번째 항해의 성공을 보며 많은 이들이 일확천금을 바라며 항해에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콜럼버스는 이번 항해에서 좀 더 멀리 떠나 반드시 금광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스파뇰라 섬에 상륙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원주민들에게 몰살당한 선원들의 모습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외지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그 땅의 원주민들은 이미 그들의 약탈과 강간에 화가 나 마음을 돌린 뒤였다.

꿈의 땅인 줄 알고 콜럼버스를 따라갔던 선원들은 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그곳의 풍경에 동요하기 시작한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에 들고갈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금광을 채굴하는 데신 노예사냥을 시작한다. 그는 타이노 족 5백 명을 4척의 선박에 실어 유럽에 노예로 팔았으며, 14세 이상의 원주민 남자들에게 석 달에 한번씩금을 바치도록 했고 이를 채우지 못할 시 손발을 절단했다고 한다.

결국 2차 항해에서 콜러버스 일행이 에스파냐로 보낸 것은 주로 노예였으며 이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온 1496년 문책당하였다.

3차 항해

3차 항해는 1498년에서 1500년까지 진행된다. 콜럼버스는 제 3차 항해에 칼데아 신아람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선원 두 명을 델리고 갔다. 목적지인 남아시아에 다다르게 될 경우, 에덴 동산의 거주자들이 이 언어를 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해 도중, 에스파뇰라 섬에서 내부 반란이 일어나며. 콜럼버스의 행정적 무능이 또다시 제기되며 콜롬버스는 본국으로 송환당한다. 결국 2,3차 항해에서 콜럼버스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다. 

4차 항해

4차 항해는 1502년부터 1504년까지 진행된다. 이 항해에서 콜롬보는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을 발견하고 귀국하였다.

콜럼버스는 총 4번의 항해를 하지만, 두 번째 항해부터 서서히 몰락한다. 왕과 여왕은 콜럼버스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끝에가서는 그의 항해에 동참하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콜럼버스가 4번째 항해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왔을 때 여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며 왕은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콜럼버스의 말년은 꽤나 씁쓸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대륙이 오늘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가 된 이유와, 그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역사를 바꾼 혁신의 아이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②'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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