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이 매국노 브랜드?
샤넬백과 슈즈
샤넬 사망후
럭셔리의 반대말은 빈곤이 아니라 천박함이다
- 가브리엘 샤넬 -

[월드투데이 이하경 기자] 오늘은 샤넬의 후반기 역사와 오늘날 샤넬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 나눠본다.
전성기
1913년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후인 1915년에<메종 드 꾸띠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 애호 취미로부터 영향을 받아 모조 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1934년에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액세서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한다. 1939년 약 4천 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나 노동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노동조건에 항의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벌였다.
샤넬은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사업을 접기로 해 일시로 은퇴한다. 이후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1954년 71세의 나이로 다시 패션계에 복귀한 샤넬. 전쟁이 끝난 후 실용적인 복장이 아닌 화려한 의상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면서 패션업계의 새로운 트렌드가 변화한다.
하지만 샤넬은 이런 트렌드는 특정 계층만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1954년 2월 편안한 의상들이 주를 이룬 샤넬 컬렉션을 선보였다고 한다.

1955년 2월 샤넬은 2.55백을 출시한다. "마드모아젤 락"으로 불리는 네모난 잠금 장치와 퀄팅 가죽을 골드체인과 결합한 숄더백이 특징인 2.55백은 여성의 손을 자유롭게 유지할 수 있는 유연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어깨끈을 발명한 것으로 설명했다.

1957년 샤넬은 대표적인 투톤의 슬링백 신발을 제작한다. 검정색과 베이지 색상으로 된 슬링백은 발을 작아보이게 하고 다리는 길어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를 보여준다고 한다. 이 해 샤넬은 미국 댈러스에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패션오스커상을 수상한다.
매국노 브랜드로 불리다
■ 스파이 생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했다.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하다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독일(나치)군 장교인 '한스 귄터 폰 딩크라게'와 연인으로 지냈기에 파리의 '리츠호텔' 스위트룸에서 장기투숙하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당시 샤넬과 교제했던 나치 장교는 '슈파츠'라 불리며 괴벨스에게 직접 보고할 정도로 거물급인 나치 스파이의 총책임자였다. 이런 이유로 1944년 샤넬은 프랑스가 해방 된 이후 프랑스 정부로부터 스파이 의혹과 함께 심문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과거 연인이었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교제할 당시 알게 된 영국의 총리 '윈스터 처칠'의 도움으로 심문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 그녀는 수년간 스위스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지낸 거승로 전해진다.
샤넬이 나치의 스파이 노릇을 했을 것이라는 소문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고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진실 규명을 하지 못했고 세월이 흘러 2014년 12월 진실이 드러난다. 그녀가 정말로 나치의 스파이였던 증거가 포착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 첩보기관들이 주도한 지하공작을 연구해온 프랑스 역사학자 모임은 '가브리엘 샤넬' 등 유명 인사들의 당시 행적과 공작 등을 소상히 기록한 수천 점의 비밀 기록들을 70년만에 공개한다.
샤넬 관련 파일 중에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 1944년 11월 파리에서 작서된 메모도 포함되어 있었다.
메모에는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는 한 정보원은 샤넬이 1942년부터 이듬해까지 권터 폰 딩크라게 남작의 정부 겸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알려왔다"며 "딩클라게는 1935년 스페인 주재 독일 대사관 주재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고 선전전문가로 첩고기관 요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우리의 판단"이라고 밝히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샤넬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매국노 브랜드'라는 혐오적 인상을 가진 브랜드로 남아있다.
1954년에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며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샤넬의 2차대전 당시 언동에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유럽에서는 '매국노'라는 경멸과 독일에 대한 혐오감으로 계속해서 샤넬의 발목을 잡았다. 반대로 비국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진출 분위기와 맞물려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편안한 디자인의 의류들이 인기를 끌었다.
■ 사망

1971년 37년간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8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당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 등으로 프랑스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해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 로잔에 매장되었다.
라츠호텔은 샤넬을 가리기 위해 그녀가 머물렀던 방을 '코코샤넬 스위트룸'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샤넬 사후
■칼 라거팰트의 영입

1982년 칼 라거펠트가 샤넬에 영입된다. 당시 라거펠트는 기성복 디자이너로 활동했었는데, 이런 근의 경력으로 영입 초기에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1983년 1월 첫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기존 샤넬과 대중적인 문화를 조합해 젊고 캐주얼한 샤넬로 변화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현재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로 샤넬 고유의 클래식함과 심플함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그의 영입 후 샤넬 부티크를 하이패션 최고의 경지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그가 샤넬 디자인을 맡으면서 고객 연령층이 굉장히 다양해지고 매출이 증가하는 등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