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술을 통해 지식의 혁신을 이룩한 위인
구텐베르크의 생애, 업적
한국의 인쇄술

[월드투데이 이하경 기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독일에서 세계 최초로 '금속 활판 인쇄술'을 개발한 독일의 금 세공업자다. 오늘은 인쇄술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구텐베르크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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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의 생애

인쇄의 역사는 구텐베르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금속 활자 이전에는 일일이 손으로 배껴 써서 책을 만들거나 목판 인쇄 방식을 활용해야 했다. 이 시기까지는 책이 매우 비싸고, 보석 등으로 장식한 사치품의 개념으로 존재했다.

이후, 종이의 공급이 확대되고 세계 각지에 대학이 세워지며 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이 시기와 맞물려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 인쇄술을 개발하였고 인쇄술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사진= 마인츠 대성당, 독일 관광청]
[사진= 마인츠 대성당, 독일 관광청]

구텐베르크의 생애와 관련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몇 가지 기록을 통해 그의 삶을 알아본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구텐베르크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조폐국에서 일했고, 어머니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린시절부터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성인이 되서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1434년, 고향인 마인츠를 떠난 구텐베르크는 스트라스부르로가서 본격적으로 인쇄술을 연구한다. 당시엔 금 덩어리를 문양이 새겨진 펀치로 때리는 방법을 사용해 동전을 만들어냈다. 조폐국에서 일하던 부친의 영향으로 금화 제조법에 대해 접했던 그는 이 기술을 인쇄술에 응용한다.

[사진= 구텐베르크 인쇄기 ,구텐베르크 박물관]
[사진= 구텐베르크 인쇄기 ,구텐베르크 박물관]

구텐베르크는 포도주를 짤 때 사용하는 압착기를 개조해 근대적 인쇄기계를 만들어 불편하고 번거로웠던 인쇄술을 기계식으로 개발하여 대량 인쇄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큰 업적을 이룬다. 무거운 압착기 나사볼트를 이용해 활자판을 눌러 인쇄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같은 방식으로 주형에서 제작한 인쇄용 금속활자를 나무틀에 하나하나 심어서 조판하는 방법을 고안하였다. 기존의 목판인쇄는 나무틀에 글자를 세겨 찍어내는 방식으로 한 글자만 잘못되어도 판 전체를 갈아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이동식 금속활자는 각각의 조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에 자유롭게 배치가 가능했고 매우 신속하고 경제적인 방법으로 인기를 얻게 된다.

그의 인쇄술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차별성을 가진다.

첫째, 앞서 말했듯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음과 모음들이 각인된 금속 활자 합금을 사용한다. 둘째, 포도주 제조 및 제지, 제본에 사용되는 프레스를 응용해 인쇄기를 제작한다. 셋째, 동양과 달리 유성의 인쇄 잉크를 사용한다. 

[사진=구텐베르크 성서, 구텐베르크 박물관] 
[사진=구텐베르크 성서, 구텐베르크 박물관] 

1448년 마인츠의 고향집으로 돌아온 그는 인쇄소를 차리고 교과서 예배서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1450년경 구텐베르크의 업적 중 단연 최고로 꼽히는 '구텐베르크 성서' 제작이 시작된다. 총 1272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본서는 탁월한 디자인과 레이아웃으로 오늘날까지도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구텐베르크 인생의 결말은 그리 좋지 못하다. 함께 사업을 하던 동업자 푸스트가 소송을 제기해 그의 인쇄 사업을 가로챘고, 사업 시작 6년만에,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던 사업에서 하차하게 된다.

업친데 겹친 격으로 실명을 하여 책을 보지 못하며, 세간의 뇌리에서 잊혀진 채 12년 후인 1468년 2월 3일 세상을 떠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세상에 끼친 영향

[사진= pixabay]
[사진= pixabay]

구텐베르크 인해 시작된 인쇄술은 오늘날 인터넷의 개발과 같은 수준의 '혁명'을 이룩했다.

금속활자술 이전에는 2개월에 책 1권이 필사되는 속도였지만, 이후엔 일주일만에도 책 500권을 인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보의 대폭발은 정보의 양 뿐 아니라 질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인류의 문자문화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성서의 대량인쇄가 시작되며, 성직자와 지식인들만 접할 수 있었던 성서를 대중화 시킨다. 성서를 비롯한 책들이 필사본으로 수량이 적고 가격이 매우 비싸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활판 인쇄술이 서양에 등장하며 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며 많은 사람들이 책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 개혁'역시 구텐베르크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사건이다. 1517년,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는 뜻을 담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신속히 인쇄, 배포되며 종교개혁의 막이 올랐다. 활판 인쇄술로 대량 인쇄된 반박문은 두 주 만에 독일 전역, 두 달 만에 유럽 전역에 널리 펴졌다고 한다. 

21세기, 인터넷과 전자책의 보급으로 성급하게 종이책의 종말을 선언한 사람도 있지만, 종이책 종말의 시기는 아직 한참 이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인쇄술

[사진= 직지심체요절, pixabay]
[사진= 직지심체요절, pixabay]

"한국의 인쇄문화는 구텐베르크보다 앞서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을 것이다. 실물은 전해지지 않고있지만, 문헌에 따르면 고려 고종 때인 1230년 간행된 '사엉예문'이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것으로 알려진다.

1377년에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은 1972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인정을 받으며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무려 80년 앞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쇄술은 서양처럼 사회의 변화를 만드는 혁신으로 이어지지 모산다. 

그 이유는 정부가 그것을 독점하며 사상적 검열을 하는 등의 의도로 이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이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바탕에는 변화에 반응할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업적은, 변화와 혁신으로의 발전에 사회가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거대한지 역설해 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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