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티첼로의 성인', '독립선언문 작성자', '버지니아대학교 설립자', '미국 제3대 대통령'
1743년 탄생, 1826년 사망...미국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은 러시모어 바위 산 조각에서 왼쪽 끝에서 두번째에 위치해 있다 [사진=unsplash]
토머스 제퍼슨은 러시모어 바위 산 조각에서 왼쪽 끝에서 두번째에 위치해 있다 [사진=unsplash]

FOUR PRESIDENTS WHO MADE AMERICA GREAT

 

[월드투데이 전유진 기자]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에는 세계 최대의 조각품이 있다. 바위산 자체를 조각한 것으로 현재의 위대한 미국을 있게 한 네 명의 대통령 얼굴을 담았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 주인공이다. 4명의 대통령이 어떻게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그 삶을 살펴본다. 

미국 2달러 지폐에 있는 토마스 제퍼슨 얼굴 [사진=unsplash]

◆ 신생국 미국을 일군 토머스 제퍼슨

토머스 제퍼슨은 러시모어 바위 산 조각에서 왼쪽 끝에서 두번째에 위치해 있다.

미국의 건국 주역 중 한명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제3대 대통령이지만, 그 외에도 철학가, 사상가, 건축가, 초대 국무부 장관 등 다양한 이력을 지녔다.

그는 미국 독립선언서를 작성했고,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미국의 영토를 넓혀 미국의 성장(Growth)을 상징한다고 한다.

◆ 자유를 향한 열망으로 민주주의 기반을 다지다

제퍼슨을 표현하는 키워드는 여러가지다. ‘몬티첼로의 성인’, ‘독립 선언문 작성자’, ‘버지니아 대학교 설립자’. 그 중 그가 초기 미국에 이바지한 것을 잘 표현하는 키워드는 ‘미국 민주주의의 이론가’다. 링컨과 워싱턴이 실천가로서 민주주의를 가꾸었다면, 제퍼슨은 자유를 향한 열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을 단단히 쌓아갔다.

제퍼슨은 한 평생 ‘자유’에 대하여 고심했다. 자유에서 더 나아가 ‘행복추구권’을 인간 천부적 권리로 규정하며 미국 독립운동의 이론적 기반과 현재 미국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쳤다. 아래는 자유를 향한 굳은 다짐이 묻어나는 그의 명언이다.

나는 성스러운 신의 제단 앞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종류의 독재에 맞서 영원히 싸울 것을 맹세한다.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 [사진=unsplash]

◆ 버지니아 앨터발 카운티 출생

토머스 제퍼슨의 생애를 천천히 따라가보자.

그는 1743년 버지니아주 앨버말 카운티에서 태어났다. 그는 농장주이자 측량기사였던 아버지로부터 5,000여 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상속받았으며, 명문 랜돌프 가문 출신인 어머니에게서 높은 사회적 계급을 물려받았다. 조지 워싱턴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농장주 가문 출신의 사람이었다.

◆ 법률을 공부하며 정계로 진출하다

제퍼슨은 윌리엄 앤 메리 대학을 졸업하고 법률을 공부했다. 1767년 성인이 되어서 변호사가 되어 여러 법 문제를 다루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던 그는 1769년 버지니아 식민지의회 하원의원이 되며 정계에 진출한다.

당시 미국 식민지와 영국 정부는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제퍼슨은 이때 영국 본토가 식민지에서 벌이는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쓰며 이름을 알린다

한편, 1772년에는 미망인이었던 마사 웨일즈 스켈턴과 결혼했다. 이후 당시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언덕 위의 저택 ‘몬티첼로’에 신방을 꾸몄다.

◆ 말이 아닌, 펜 끝으로 설득하다

주근깨 박힌 얼굴에 엷은 갈색 머리, 다소 어눌한 느낌을 주던 제퍼슨은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청중을 휘어잡는 웅변가는 아니었다.

1775년 버지니아 대표로 33세의 젊은 나이의 그가 제1,2차 대륙회의에 참여했을 때에도 목소리보단 펜으로 그를 알렸다. 뛰어난 문장가였던 그는 1776년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출되며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게 된다.

[사진=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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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독립 선언문

1776년에 작성된 미국의 독립 선언문은 미국의 토대가 되는 주요한 사상들을 담고 있다.

미국의 독립은 절대 왕정이 아닌 민주주의적 혁명의 성격을 가지며 자유, 평등과 인민 주권의 확립을 이루려는 시도였다. 그 결과물인 미국 독립 선언문은 천부 인권을 천명하고 로크의 사회 계약설의 영향을 받아 인민 주권과 저항권을 명확히 했다.

◆ 독립선언문에 담긴 제퍼슨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독립선언서에는 제퍼슨이 천명한 미국 민주주의의 대의가 담겨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논의 과정에서 벤자민 프랭클린 등 여러 사람의 의견도 포함되었지만 그래도 독립선언서에는 제퍼슨이 평소에 갖고 있었던 신념이 곳곳 존재한다.

제퍼슨의 정치사상은 그로부터 100년 전에 활동했던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의 정치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미국 독립전쟁에서 그는 미국을 지지하였고, 독립선언문 작성에 참여해 인권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작성하였다. 이렇듯 제퍼슨은 인권 문제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졌다.

◆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애쓰다

독립선언문 작성 이후 그는 버지니아에서 수 년을 보내며 독립선언서의 문구들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했다.

1786년 종교의 자유를 규정한 법안을 통과시키고, 1785년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공사에 임명됐다. 그 이후 조지 워싱턴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재임했다.

토마스 제퍼슨의 동상 [사진=pixabay]
토마스 제퍼슨의 동상 [사진=pixabay]

◆ 정파간 갈등 격화 그 사이의 제퍼슨

국무장관으로 재임하며 그는 연방주의자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독립전쟁 후 군비 등으로 생긴 채무를 각 주가 균등하게 나눠서 갚을지, 알아서 각자 갚을지의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빚을 덜 진 주의 이익이 걸린 문제였기에 제퍼슨은 연방주의자들이 균등하게 납부하자는 의견에 반대를 표했다. 정파간 갈등이 심화되며 그는 1793년 퇴임했고, 연방주의자와 민주공화주의자로 대별되는 양대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제퍼슨은 공화파를 점진적으로 이끌었으며 연방주의자들의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에 반대하고 각 주의 자치권을 옹호하였다.

◆ 제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연방주의자와 민주공화주의자로 세력이 양분화 되었을 때, 조지 워싱턴이 3선 불출마 선언을 했다.

새로운 2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연방주의자와 민주공화주의자가 맞붙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연방주의자들의 후보인 존 애덤스와 민주공화주의자의 후보인 제퍼슨이 대결했으나, 제퍼슨이 패배했다.

당시에는 대선 2등이 부통령이 되었기에 1796년 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 후 4년 뒤 1800년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사진=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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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업적

제퍼슨은 취임 후 육해군 국방비 지출을 삭감하고 정부예산을 긴축 편성하며 국민들의 부담을 줄이고자 했다. 또한 서부지역 주민들의 최대 불만 사항이던 위스키 주세를 폐지하고 국가 채무 규모를 3분의 1이상 축소했다.

또한 지중해 연안에서 미국의 교역을 방해하던 바르바리 해적들을 소탕하기 위해 해군 소함대를 파견하였다. 또한 루이지애나 지역을 매입하기도 했다.

제퍼슨은 18804년 그는 다시 재선에 성공한다. 그러나 두번째 임기기간 동안 미국이 영불전쟁에 휘말리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고심했지만 금수조치와 중립주의 등이 역효과를 냈고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신방을 차린 몬티첼로, 그는 '몬티첼로 성인'으로도 불린다 [사진=pixabay]
신방을 차린 몬티첼로, 그는 '몬티첼로 성인'으로도 불린다 [사진=pixabay]

◆ 다시 돌아온 몬티첼로

그는 조지 워싱턴 대통령처럼 재선 후, 3선에 도전하지 않고 1809년 4월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왔다.

정계 은퇴 후 몬티첼로로 돌아온 제퍼슨은 고향에 머물면서 버지니아대학 건립 등 여러 사업을 했다. 1819년 설립한 버지니아 대학교에 스스로 학장으로 취임하며 민주적 교육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

버지니아 대학교 교정 모습[사진=pixabay]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교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

1826년 7월 4일, 독립선언 50주년 기념일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명은 그가 생전에 직접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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