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경제성장한 미국의 국격을 끌어올리다
1858년 출생-1919년 사망

FOUR PRESIDENTS WHO MADE AMERICA GREAT

[사진=
[사진=unsplash]

[월드투데이 전유진 기자] 미국 사우스다코타 주에는 세계 최대의 조각품이 있다. 바위산 자체를 조각한 것으로 현재의 위대한 미국을 있게 한 네 명의 대통령 얼굴을 담았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즈벨트,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 주인공이다. 4명의 대통령이 어떻게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그 삶을 살펴본다.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사진=unsplash]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사진=unsplash]

◆ 존경받는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20세기 미국은, 명과 암이 확실한 국가였다. 남북전쟁 이후 놀라운 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경제력집중과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의 문제가 뒤따라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과제도 중요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마지막 네 명의 대통령 중, 마지막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이 과제를 훌륭히 해냈다.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식견과 추진력은 미국의 국격을 한 단계, 혹은 그 이상 올려놓았다고 평가받는다. 많은 미국인에게 존경받는 그의 삶에 대해서 알아본다.


◆ 출생과 유년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1858년 10월 27일 뉴욕주의 뉴욕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루즈벨트는 병약한 아이였다. 천식과 약한 몸으로 앓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성격은 쾌활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두 발로 직접 세상을 탐험하지 못하는 대신, 책을 통해 여러 동물이나 곤충 등을 접했으며 명석한 두뇌로 한 번 읽은 책을 그대로 외웠다고 한다.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진=unsplash]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진=unsplash]

◆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관계, 루즈벨트 가문

미국에는 두 명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존재한다.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외 제32대 대통령이 될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있는데 실제로 이 둘은 먼 친척 뻘이다. 같은 루즈벨트 가문이기 때문인데, 루즈벨트 가문은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왔으며 19세기 들어 무역업과 금융업 등으로 상당한 부를 쌓았다.

◆ 건강을 회복하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되찾는다. 그가 하버드에 입학하고 나서는 대학 권투 클럽에 들어 아마추어 선수로 뛰기도 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약한 심장은 평생 쫓아다녔으나 그는 이를 잘 내색하지 않았다.

◆ 두번의 결혼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1880년 앨리스 리라와 결혼한다. 4년뒤 첫 아이를 출산했으나 앨리스는 아이를 낳자마자 장티푸스로 숨졌다. 그리고 그 직전에 루즈벨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루즈벨트는 몇 시간 사이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그날 그의 일기장에는 "내 인생에서 빛은 사라졌다"고 적혔다.

그 이후 루즈벨트는 2년 뒤, 어릴 때 친구인 에디스 캐로우와 재혼했다.


◆ 정치 입문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콜롬비아 대학교의 로스쿨에 입학했으나 23세 때 공화당원으로 뉴욕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며 중퇴했다. 공정성과 진실됨을 중요하게 여기며 타락한 파벌정치에 저항하고 소신 있는 행동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동시에 같은 당 내의 많은 적이 생기기도 했다.

◆ 소신 있는 행보

1884년 잠시 정계에서 물러나 서부지역의 목장에서 집필을 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다시 정치의 꿈을 이루고자 1886년 10월 뉴욕시장에 출마했다. 시장에는 낙선했으나 그 이후 뉴욕 주의원, 뉴욕 경찰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한다. 또한 1889년부터 5년간 개혁위원회 의원을 지내며 이후 뉴욕시의 경찰총장으로 임명된다.

◆ 스페인 전쟁으로 이름을 알리다

그가 미국 전역에 이름을 떨치게 되는 계기는 1897년 해군부 차관이 되면서이다. 그는 미 해군의 보강과 스페인과의 전쟁을 강력히 주장했다. 1898년 전쟁이 선포되자 '러프라이더(Rough Rider) 연대'라는 별명을 가진 의용군을 조직하여 중령 지위로 쿠바에 출정한다. 쿠바에서 그는 케틀 힐 전투와 산 후안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국민적 영웅으로 거듭난다.

◆ 뉴욕 주지사

전역 후 1899년 1월부터 뉴욕 주지사의 자리에 오른다. 재임기간 동안 인맥과 연줄로 채용된 공직자 및 부패하고 무능력한 공직자와 경찰 등을 숙정하고 법인면허세와 공무원 공개채용제도를 확립하였다.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동상 [사진=unsplash]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동상 [사진=unsplash]

◆ 대통령직

뉴욕 주지사로 있던 루즈벨트는 19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윌리엄 매킨리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된다. 매킨리가 당선되며 부통령 자리에 올랐으나 갑작스러운 매킨리 대통령 저격사건과 그의 사망으로 1901년 9월 제2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당시 만 43세도 되지 않았던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당시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었다.

1904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1909년까지 재임했다. 또 러일전쟁의 중재, 모로코 분쟁 해결 공로 등으로 190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 '중재자'로서의 정부

대통령으로 집무하는 동안 루즈벨트는 '중재자'로서의 정부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경제정의를 보장하고 특정집단의 특혜를 방지해야 하며,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최대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1902년 석탄 파업 당시 물가와 산업 분야에 대해 정부가 적극, 개입 간섭했다. 또 '셔먼독점금지법'을 부활시켜, 거대 철도회사인 노던 시큐어리티사의 해체를 시작으로 스탠더드 오일 및 노던 증권, 모건 철강 등을 해체했다

죄측 시어도어 루즈벨트 [사진=unsplash]
죄측 시어도어 루즈벨트 [사진=unsplash]

◆ 더 넓은 국제무대로

루즈벨트는 경제적 성장을 이룬 미국을 국제 정치 무대로 이끌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먼로주의의 확대였다. 먼로주의는 아메리카 국가들의 내정 문제에 비(非) 아메리카인의 개입을 금지하고 미국이 중남미 지역에 개입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먼로주의에 따라 베네수엘라 문제, 카리브해 문제, 파나마운하 건설 등 강력한 외교를 추진했다.

또한 국제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는 러일 전쟁의 종전을 중재했으며 일본과는 이민 문제에 관한 신사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백색함대를 세계일주 친선 항해 길에 오르게 했다. 1905년 프랑스와 독일을 중재해 모로코 분쟁을 해결하기도 했다. 이로써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한편 육군장관 태프트를 도쿄로 보내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기로 합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이름을 딴 국립공원 [사진=unsplash]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이름을 딴 국립공원 [사진=unsplash]

◆ 환경보호에 앞장선 루즈벨트

루즈벨트는 환경보호에도 앞장섰다. 1902년에 크레이터 국립공원을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임기 중에 국립공원 수를 두 배로 늘렸다. 1903년에는 루이지애나 주의 펠리컨 섬을 미국 최초의 조류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임기 중에 총 51개의 보호구역을 지정했다. 또 산림청을 신설하고 유명한 자연보호운동가인 기포드 핀초를 청장에 앉혔다. 이후 산림보호구역은 루즈벨트 이전보다 약 5배로 늘었다. 1908년에는 천연자원 보호안을 만들었으며 이듬해에는 백악관에서 북미 환경보호회의를 개최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환경보호에 앞장 섰다 [사진=unsplash]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환경보호에 앞장 섰다 [사진=unsplash]

◆ 그 때 그 당시 미국

루즈벨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그 당시 미국이 어떤 나라였는지 살펴봐야 한다.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기 40년 전에 벌어진 남북전쟁으로 미국은 수없이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겪었으나, 내부의 큰 문제가 해결되며 놀랄 만한 속도로 경제가 성장한다. 1900년 당시 공업 총생산액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액수를 넘어섰으며 19세기의 영국을 대신한 "세계의 공장"이 됐다. 당시의 유럽이 쇠퇴와 불안을 이야기하는 동안, 미국은 성장하며 20세기가 '미국의 세기'가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이런 유례없는 경제성장은 그림자도 불러왔다. 우선 거대기업 등장했다. 석유업의 록펠러, 철강업의 카네기, 금융업의 모건, 철도업의 밴더빌트, 굴드 등은 바닥부터 시작해서 당대에 재벌의 지위에 올랐으며, 그들의 힘은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를 뒤흔들었다. 문제는 이들은 소득세도 내지 않고, 이들을 제재할 독점제한법도 없었다는 것이다. 노동권도 보장되지 않아 부자들은 최고의 황금시대를 누렸으나 노동자, 서민, 중소기업은 점차 소외되어 갔다. 또한 개발에 박차가 가하는 만큼 환경 파괴 문제도 심각했다.

따라서 20세기에 접어들던 미국은 경제력집중과 빈부격차, 환경파괴 등을 해결해야 했으며 거대해진 경제력에 걸맞은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 사망

1909년 대통령직을 떠난 루즈벨트는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났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저술 활동에도 힘을 쏟고30여권의 책을 쓰며 여생을 보냈다. 브라질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강을 탐사했고 추후 그 강에는 '테오도어 강'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스페인 전쟁 때처럼 지휘관으로 참전하겠다고 했으나 윌슨 행정부의 반대로 뜻을 못 이루자, 대신 자식들을 참전하게 했다. 그 중 막내아들 쿠엔틴은 프랑스에서 전사했다. 이는 이미 육체적으로 충분히 쇠약했던 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6주 만에 귀가했으나, 휠체어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차기 대통령 선거에 나갈 꿈을 꾸었으며, 집필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19년 1월 6일, 평소처럼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낸 그는 세상을 떠났다.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사진=pixaay]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 [사진=pixaay]

한편, 밀워키에서 선거유세를 하던 루즈벨트가 한 광신자에 의해 총탄을 맞은 사건이 있었다. 곧 회복하여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때 그가 남긴 말은 1919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대로 인용됐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어떤 면에서 비교해도 나만큼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저작권자 © 월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