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의 말년
콜럼버스에 대한 후대의 평가

[월드투데이 이하경 기자] 콜럼버스는 네 번의 항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지난 1506년 생을 마감한다.

항해를 끝내고 돌아온 그는 생각보다 씁쓸하고, 모두에게 외면받는 말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기까지의 과정은 '[역사를 바꾼 혁신의 아이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①'에서 살펴볼 수 있다.

후세의 평가

세상을 떠나다

금을 찾기 위해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했던 콜럼버스는 건강을 잃었고, 통풍과 관절염으로 수년간 고생하다가1506년 5월 20일 바야돌리드에서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사망할 때까지 콜롬버스는 자신이 도착했던 땅이 인도라고 확신했었다. 그러나 콜럼버스의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이 발견한 땅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보다 수 년 뒤인 1499년 콜럼버스의 뱃길을 따라 네 차례에 걸쳐 항해를 다녀온다. 1501년에 출발해 1502년 리스본으로 귀환한 두 번째 항해 이후 배스푸치는 자신이 다녀온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독일의 제작자인 발트 제뮐러가 1507년 신대륙을 아메리카로 표기한 지도를 발간했는데, 이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여행 기록에 근거해 지도를 제작한 후 그 대륙을 그의 이름을 기려 '아메리카'로 명명했기 때문이었다.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

그가 신대륙을 유럽에 알렸기 때문에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이것은 현재 미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그의 업적은 오늘날 교과서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하며 위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원주민을 잔혹하게 집단 학살하고, 조직적으로 타이노 원주민들을 노예화하고 살해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수백명의 노예들이 유럽으로 팔려가야했고, 다수는 그 과정에서 죽었다. 

노예로 팔려나가지 않은 인디언들은 땅에서 금을 채굴해야 했고,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그들의 수족을 잘랐다. 그 땅에 금이 많지 않았고 노예들이 도망가자, 콜럼버스는 노예를 동물을 사냥하듯 죽였다. 원주민들은 맞서 싸웠지만, 돌로 만든 무기들은 스페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저항하다가 붙잡힐 시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 결과 25만명에 달하던 타이노 원주민들의 수는 2년만에 절반으로 줄었고, 콜럼버스가 섬을 발견한지 60년 만에 타이노 원주민들은 수백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콜럼버스는 원주민들과의 약속도 잘 지키지 않았는데, 그의 사악한 횡포에 함께 갔던 선원들도 고개를 내둘렀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제 아무리 야만인이니 뭐니 해도 최소한 약속은 지켜야 하지 않냐"는 부하들의 반발이 있었다. 당시 콜럼버스의 부하 중에는 원주민들과 친구가 되거나 원주민 여성과 사랑에 빠져 가정을 얻어 이들 속에 섞여서 지내던 이들도 있었는데, 콜럼버스는 이들 앞에서도 개의치 않고 원주민에 대한 탄압을 이어나갔다. 


그의 이런 잔인성은 그의 항해가 수익성이 있음을 자신을 후원해 준 에스파냐와 스페인 본국에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중국이나 인도를 향하는 항로가 아니라 허름한 산골동네와 다름없던 신대륙이엇다. 

먼 훗날에는, 신대륙의 가치가 매우 높아지고 이곳의 금광과 기호품이 유럽 국가들의 재정 근간이 되지만, 콜럼버스 당시에 신대륙은 '그냥 멀리 떨어진 섬' 정도의 수준이었다. 콜럼버스는 후원을 받기 위해 100%의 이익을 장담하며  항해를 떠났으나 기대한 만큼의 이윤을 얻지 못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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