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생애, 과학적 발견

[월드투데이 이하경 기자] 17세기 과학혁명을 대표하는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미적분법, 뉴턴 역학 체계 확립하는 등 수학·물리학 영역에서 위대한 성과를 이끌어낸다.

[사진= 뉴턴 초상화, 케임브릿지 대학 제공]
[사진= 뉴턴 초상화, 케임브릿지 대학 제공]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 아이작 뉴턴

뉴턴의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1642년 12월 25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뉴턴이 태어나기 전 사망하였으며, 예정일보다 1개월 일찍 미숙아로 태어나 몸이 양말에 들어갈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3살에는 어머니가 재혼 해 집을 떠나는 바람에, 뉴턴은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손에서 크게 된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새아버지를 얻었지만, 둘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 뉴턴은 새아버지를 매우 증오해 때때로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하고, 집을 불태우겠다는 협박과 폭언을 일삼기도 하는 등 비뚤어진 청소년기를 보냈다. 다만, 의붓동생들과의 사이는 좋아 친하게 지낸 것으로 기록된다. 

뉴턴이 처음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처음 학교에 입학 했을 때 그의 성적은 중하위권 정도였는데, 그보다 성적이 조금 더 좋았던 같은 반 학우와의 갈등 후 경쟁심으로 공부를 진지하게 시작하게 되었다.

공부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뉴턴은 선생님의 조언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 시험을 보게 되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케임브리지에 입학하게 된다.1655년 영국에서 흑사병이 대유행을 하며 이 기간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폐교하였고, 2년간 고향에 내려가 지내게 된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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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뽑히는 '만류인력'의 발견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2년간의 한적한 시골살이는 과학과 철학에 대한 사색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수학·과학·천문학·물리학의 중요한 발견들을 이 시기 해낸다.

뉴턴 스스로도 "2년간의 휴학 기간은 발견에 있어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166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돌아온 뉴턴은 석사 학위를 받고, 이듬해 반사 망원경을 개발한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힌다. 이보다 앞선 1669년에는 뉴턴의 지도 교수였던 배로 교수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과 수학과 교수로 선임되며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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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2년에는 캄캄한 방 안에서 가느다란 빛줄기가 프리즘을 통과해 빨간색부터 보라색에 이르기까지 무지개색과 똑같다는 것을 발견, 색은 빛의 기본 요소이며 백식광은 스펙트럼상의 모든 색이 합쳐진 결과라는 중요한 발견을 한다.

사과나무를 보고 만유인력에 대해서는 꽤 오래전부터 구상되고 있었으나 캐플러의 행성 운동에 관한 법칙, 갈릴레이의 지상물체의 운동 연구, 하위헌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해 이론적 연구에 많은 공을 들였다.

많이 알려진 바와 다르게 모든 물체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는 '만유인력'의 존재 자체를 뉴턴이 발견한 것은 아니다. 지구 상에서 측정되는 중력과 천체운동에 필요한 구심력이 같은 것이라는 정도의 개념은 당시의 학자들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끌어당기는 힘의 크기가 얼마이며, 그것이 행성 운동에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가에 대한 부분을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에 요하네스 케플러가 행성의 공전 주기와 궤도에 대한 관측을 해 케플러의 3대 법칙으로 정립했는데, 뉴턴은 이를 갈릴레이 역학으로부터 발전시킨 뉴턴 역학과 미적분이라는 수학적 도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만유인력을 수학적 표현으로 정립해낸 것이다. 

인생 말년에 떨어지는 사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직접 언급하긴 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에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았다.

이후로도, 뉴턴은 1727년 3월 31일 84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핼리 혜성의 운동에 대한 토론, 공기보다 작은 입자인 '에테르'의 존재를 밝히는 실험 등을 고안하며 오늘날까지 과학의 거인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사진= 에스트민스터 성당 제공]

뉴턴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까지도 성질이 좋지못해 '괴팍한 노인네'로 불렸다고 한다.

뉴턴은 죽은 후 영국의 위인들이 잠든 에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되었다. 함께 사원에 안장된 과학자로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찰스 다윈, 찰스 라이엘 등이 있다. 석관 위에는 그가 자신이 쓴 저서들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몸을 기댄 모습이 조각되어있으며, 연구에 사용됐던 망원경과 프리즘 등의 기구가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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