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세우다

[월드투데이 이하경 기자] 오늘은 타임지에서 선정한 '세계 역사를 바꾼 인물 TOP20'에도 소개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소개한다.

[사진=대영박물관]
[사진=대영박물관]

빅토리아는 1819년 5월 24일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왕으로 1837년부터 죽기 직전인 1901년까지 67년간 재위한다. 그녀는 현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의 고조모로, 본명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 하노버다.

1837년 큰아버지 윌리엄 4세가 서거하지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하노버 왕가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 1세 때부터 계속된 영국과 하노버의 동군 연합관계는 그녀의 즉위와 함께 끝났고,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의 왕위만 계승하여 재위하게 된다. 

빅토리아의 재위 기간은 '빅토리아 시대'로 통칭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대영 제국의 최전성기와 일치한다. 지구가 돌아 영국에 밤이 오더라도 영국의 식민지 중 한 곳 이상은 낮이었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빅토리아의 생애

빅토리아는 1819년 5월 24일 런던의 켄징턴 궁전에서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와 작센코부르 크잘펠트 공녀 '빅토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며 새 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다. 

[사진= 여린시절의 빅토리아, 대영박물관]
[사진= 여린시절의 빅토리아, 대영박물관]

빅토리아는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할아버지인 조지 3세의 직계 혈통이 끊어지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조지 3세는 1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조지 4세의 유일한 적통 샬럿 오거스타 공주가 죽으면서 빅토리아가 상속인이 되었다.

즉위 후 빅토리아는 버킹엄 궁전에 들어가 어머니를 자신의 거처에서 멀리 떨어진 방으로 쫓아내고 코로이도 연금을 주어 퇴직시키며 자유를 누리게 된다.

즉위 당시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 불어닥친 경제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1832년 선거법 개정으로 중산층에도 선거권이 주어지자, 이에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이 헌장을 선포하고 자신들의 권익들이 관철되기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을 벌였다.

[사진= pixabay]
[사진= pixabay]

빅토리아 여왕은 혼란스러운 영국 사회를 보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게 된다. 빅토리아는 그녀의 외사촌이자 독일계 왕족인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 공작과 결혼하게 된다. 1840년 2월 결혼한 이후 앨버트 공작은 빅토리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된다. 빅토리아는 자신의 훌륭한 정치적 조언자인 남편을 깊이 사랑하고 신뢰하였다.

남편 엘버트도 아내를 사랑해 아내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심을 받는 국가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빅토리아의 외교와 아편전쟁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를 가속화하여 영토확장에 전력을 쏟았다. 이로 인해 영국은 여러 대륙에 걸쳐 식민지를 확보하고 식민제국을 수립하여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빅토리아의 통치 기간동안 영국의 영토는 세계 전체 대륙의 1/4를 확보하는 대 제국이 된다. 

'아편전쟁'도 빅토리아 시대의 큰 이슈였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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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세기 유럽에서는 청나라의 도자기와 차, 비단 등이 큰 인기를 끌었고, 청은 이 물건들을 교역하여 유럽으로부터 수많은 은을 확보하였는데 당시 청나라는 지정은제를 도입하여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은 청나라와의 교역에서 무역적자가 이루어지자 동인도회사를 통해 다량의 아편을 밀매로 지속적으로 중국에 유입시켰다. 청나라는 1729년 아편금지령을 실시했으나 이후 100년간 아편은 끊임없이 대량으로 유입되 국가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청나라 황제 도광제가 임칙서를 광저우에 특사로 파견해 아편을 몰수하고 불태우자 영국에서는 청과 전쟁을 벌이자는 의견이 들끓었다. 1840년 6월, 영국이 청나라를 침략하며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고 여기에서 패한 청나라는 중국을 반식민지화 하고 홍콩은 영국에 할양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빅토리아의 업적

[사진= 빅토리아와 앨버트 공]
[사진= 빅토리아와 앨버트 공]

이렇듯, 빅토리아는 강하고 소박하며 정치적인 성격으로 내각의 보고서를 한 자, 한 구절까지 면밀히 검토하는 성실한 왕이었다. 선거법 개정,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국과의 전쟁, 아일랜드 문제, 초등 교욱법 등 국내외의 중대한 문제들을 교묘하고 과단성 있게 해결해 제국의 번영을 실현시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다. 

대영 제국이 변영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왕으로, 그녀가 정치를 하는 동안 영국은 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군주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런던에 있는 빅토리아 앨버트 미술관과 빅토리아 폭포를 비롯한 영국과 영국의 식민지였던나라들의 지명과 건축물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또 그녀는 하노버 왕가의 마지막 왕이자 인도 제국을 통치한 최초의 왕이다. 그녀의 가장 큰 업적은 영국 군주 최초로 인도제국을 통치한 것과 왕실에 대한 신뢰감을 높였다는 점이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느다'는 원칙을 따라 정치는 내각에 맡기고 왕은 권위와 위엄을 갖는 철저히 분리된 정치를 통해 국민들에게 왕실에 대한 신뢰감을 높였다는 점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 앨버트가 살아 있을 때부터 국정의 일부를 내어놓기 시작해 1861년 남편 앨버트 공이 병사하자 버킹엄 궁전으로 물러나 일반적인 국무에서 손을 땠다. 그녀는 자신이 내놓은 통치권의 일부를 수상과 정치인들이 백성들의 구미에 맞게 행사하는 동안 자신의 안전과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사안의 결정권은 끝까지 쥐고 있었다.

무리한 고집을 부리지 않고 때에 따라 적재적소에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면서도 국사 전반에 이들 남성들의 힘을 빌렸다. 이런 그녀의 판단은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 수상들의 전폭적인 신뢰, 영국과 영국 왕실의 안녕까지 얻게 해준다. 

역사와 시대의 흐름 속에 판세를 그릴 줄 알았던 현명하고 양보심 많은, 그러나 왕으로서의 권위는 유지했던 빅토리아 영왕은 대영제국의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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