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판 지각변동
제무르, 마크롱 안정세 꺾고 대선판 흔들어
둘중에 누가 될지는 역사가 말해줘

[사진=연설하는 마크롱 대통령, 연합뉴스]

[월드투데이 김지현 기자] 올해는 한국을 포함, 14개국에서 총선과 대선이 치뤄진다. 그 중 프랑스가 오는 4월 대선을 통해 본격적으로 선거의 해를 연다. 

이번 프랑스 대선은 백가쟁명이 따로없다. 마크롱 현 대통령도 출마 의사를 밝혀, 극우성향 정치인 마린 르펜과 그의 각축전이 재현될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17년 대선 당시 두 후보의 격차는 약 2%에 불과했다.

슈퍼루키도 등장했다. 언론인 출신 에리크 제무르는 정치 활동 경력도 없고 소속 정당도 없다. 그러나 여론조사에서 대선 후보 지지율 2위에 오르며 지난 대선에서의 마크롱을 연상케 했다. 

쟁쟁한 여성 후보도 다섯 명이나 된다. 토비라 전 프랑스 법무장관과 발레리 페크레스로 둘은 각각 진보와 보수 거대 양당의 후보다. 후보들의 향연 속 이번 대선 결과는 어느 때보다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사진= 나폴레옹의 초상, 연합뉴스]
[사진= 나폴레옹의 초상, 연합뉴스]
"과거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대선 결과가 짙은 안개로 가려진 와중에도 대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말한다. 그 열쇠는 바로 프랑스가 걸어온 역사의 길이다.

그러나 단순히 역사를 아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읽어낼 수 없다. 국가의 역사 속 숨겨진 '시대정신'을 찾아내는 작업이 동반돼야 한다.  

'시대정신(Zeitgeist)'은 어느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정신이다. 전문가들은 시대정신이 다양한 승리 법칙과 선거 양상을 관통하고 대선의 승패를 가른다고 말한다.

시대정신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 단어를 창시한 헤겔조차 '그 시대가 끝나야만 비로소 시대정신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의외의 힌트가 있다. 바로 혁명이다.

프랑스의 역사를 보면 가히 혁명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군주제를 철폐한 프랑스대혁명부터 1960년대 대학을 중심으로 진행된 68혁명까지 말이다.  

지금까지의 프랑스 모든 혁명의 역사에는 당대의 시대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혁명을 관찰하면 국민들이 그 당시 무엇을 절실히 원하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게 바로 시대정신이다.  

[사진=쿼터동전에 새겨진 평화주의자 마야 안젤리우, 연합뉴스]
[사진=쿼터동전에 새겨진 평화주의자 마야 안젤리우, 연합뉴스]

아포칼립스 시대의 도래와 68혁명

'아포칼립스'는 영화를 많이 접한 사람에게는 친숙한 단어일 듯하다. 간단하게 말해 '종말'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1960년대는 수많은 선진국에게 하나의 아포칼립스적 시대(an apocalyptic age)였다. 거의 전 세계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던 미국식 자유 자본주의에 놓임에 따라 정치, 사회, 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과도기적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경제 활성화와는 다른 이야기다. 컬러 텔레비전이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자동 국제 전화의 개발로 1분 안에 전 세계 연결이 가능해졌다. 인간을 태운 우주선이 달에 도착했던 것도 이 시기다. 

이러한 발전은 당시 사람들이 인지하기도 전에 일어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비가시적이고 비인간적인 힘이 자신들을 조롱하고 있다고 느끼게 됐다. 

[사진= 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 월스트리트, 연합뉴스]
[사진=자본주의의 상징인 미국 월스트리트, 연합뉴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 자본주의를 받아들임에 따라 프랑스는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1945~1975) 시기를 누렸다. 이 시기 프랑스 가계 소비는 한 세대에 2.7배나 증가할 만큼 급격히 경제가 성장했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소비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심은 점차 커져갔다.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물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자본주의의 틀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고 여겼다. 물질적 풍요보다는 권위주의 타파, 정신적 자유를 중요시한 것이다.

1968년 3월, 자국의 베트남 참전에 항의한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파리 사무실 습격이 68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혁명은 학생들이 대규모 항의 시위에 참여하며 나날이 커져갔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습격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미국식 자유 자본주의에 대해 반항했다. 여기에 1000만 노동자들의 총 파업이 겹치면서 전례 없던 반체제, 반문화 운동이 시작됐다.

68혁명은 자본주의뿐 아니라 권위주의와 보수체제 등 기존의 사회질서에 항거하는 성격을 띠면서 미국의 반전, 히피 운동 등 세계적 저항으로 확산됐다. 

[사진=프랑스대혁명, 위키피디아]

20세기에 환 획을 그은 혁명이 정치에 남긴 것

우리는 68혁명을 통해 프랑스의 시대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60년대 프랑스인들은 '금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당시 많은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을 펼치던 드골정권은 힘을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68혁명이 좌파세력의 선전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의 눈에는 드골정권과 좌파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신좌파'의 등장이다. 드골이 물러난 후 정권에서 좌파인 프랑스 공산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산산조각 났고 신좌파 시대가 열렸다. 

68혁명은 새로운 정치문화를 수많은 국가에서 탄생시켰다. 신좌파의 탄생은 당시 시대정신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1968년 5월 파리 라탱지구 소르본대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학생들, 연합뉴스]
[사진=1968년 5월 파리 라탱지구 소르본대 앞에서 경찰과 대치하는 학생들, 연합뉴스]

68혁명과 마크롱의 연결고리

68혁명이 일어난 지 50년 가까이 지났다고 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다. 시민의식에 있어서는 새로운 세기의 출발점이다.

이때의 시대정신은 지금까지 프랑스의 주축을 담당하고 있다. 마크롱의 당선 또한 수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사진=신년인사하는 마크롱, 연합뉴스]
[사진=신년인사하는 마크롱, 연합뉴스]

프랑스 최연소 대통령인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이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은 꽤나 흥미롭다. 30대 젊은 바람으로 대선을 이기고 한 달 후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는 전례에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일어난 일이다.

마크롱의 대선 기간은 신화로 남았다. 오죽하면 안철수가 "선거 기간 석 달이면 조선왕조 500년 동안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기간"이라며 "자신이 한국의 마크롱이 되겠다"고 할까.

마크롱의 당선에 숨겨진 비밀도 바로 '시대정신'이다. 17년 대선 당시의 그는 68혁명이 연 새로운 세기에 부합한 유일한 후보였다.  

그는 돌연 사회당을 탈당했다. 제 발로 걸어 나와서는 기존에 없던 당을 신설하고 청년들을 고용했다. '마크롱 혁명'이라는 제목의 책도 냈다. 그는 프랑스가 68혁명을 일으킬 때 필요로 하던 신좌파 요구를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잘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사진=마크롱 저서, 북스타]

프랑스의 '젊은 바람' 마크롱은 프랑스를 어떻게 바꿨나

마크롱은 대선에 출마하기에 앞서 '혁명(Revolution)'을 제목으로 한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는 "나는 효율적이고 공정하고 기업가정신으로 가득 찬 프랑스를 원한다"며 "이제 새로운 혁명을 해야 한다"고 썼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공공분야와 교육에 경쟁력과 활기를 불어넣는 방향으로 SNCF 개혁, 공공개혁, 정치개혁을 밀어붙였다.

이에 2018년 대학생들의 낭테르대 점거를 기점으로 프랑스 전역이 파업과 점거에 들어갔다. 이는 공무원의 평생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마크롱의 정책과 교육 개혁안인 '비달법'에 반발하여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가 지지했던 68혁명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실제 투표에서 마크롱이 실시한 공무원 평생고용 철폐와 SNCF 개혁 등에서 국민들이 마크롱의 편에 선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좌파와는 다른 신좌파의 모습을 보여준 마크롱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른바 경제를 놓치지 않는 평등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진=시위하는 프랑스인들, 연합뉴스]

바보야, 문제는 시대정신이야

지난 1992년 미국 대선은 누가 봐도 부시가 이기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돌연 클린턴이 강력한 캐치프레이즈로 판세를 뒤집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가 외친 건 한마디였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클린턴의 당선은 어느 후보보다 국민의 '니즈(needs)'를 정확히 읽어낸 데 있다.

이번 대선의 판도가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마크롱의 승리가 예상된다. 마크롱의 그간 행보를 보면 그 어느 후보보다 국민의 니즈를 잘 읽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게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시대정신을 '건너가기'로 요약했다. 과거에 갇힌 퇴행을 넘어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사진= 프랑스 대선후보 에리크 제무르, 연합뉴스]

프랑스의 언론들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르펜을 제치고 2위에 오른 제무르에 폭발적 관심을 보이고 있다. 정치 경험도 없고 소속 정당도 없는 그는 과거의 마크롱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제무르의 당선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제무르는 바로 그 '건너가기'가 되지 않고 있다. 그는 "무슬림 200만 명을 추방해야 한다"거나 "마약 밀매를 하는 자들은 흑인과 아랍인들"이라는 맵고 짠 말만 할 뿐이다.

이는 오히려 퇴행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어렵게 일군 68혁명의 시대정신을 포기하고 대통령직을 퇴행하는 후보에게 쉽게 줄 것 같지는 않다. 

제무르가 판도를 바꿔 '마크롱 신화'를 이루고 싶다면 자신의 퇴행부터 자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걸어온 길을 봐서는 대선의 비밀이 '시대정신'에 있음을 알아채는 게 힘들어 보인다. 

진보와 보수 양 진영도 이를 새겨들어야 한다.  좌파의 조건 없는 평등과 우파의 정치독점 모두 이미 68혁명 때 공멸했음을 알아야 한다. 

다른 후보들이 시대정신을 통해 판도를 바꿀 '혁명'을 보여주지 않고선 마크롱의 재당선을 그저 지켜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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