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금속공예 발전과정: 막부형성과 폐도령 이후
일본 금속공예품 속 다양한 모티프: 불교, 박물학 등

[윌드투데이 최도식 기자] 무사계급의 존폐는 일본 금속공예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일본사회는 오랫동안 칼을 찬 무사들에 의해 주도됐다. 원래 공가 귀족들의 경호를 담당하던 무사들은 이후 자신들만의 세력을 형성해나갔고 결국 1185년에 최초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막부가 세운다. 이후 1867년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뤄질 때까지 일본 사회는 칼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칼은 무사계급을 상징한다. 내전으로 혼란스러웠던 전국시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통일되고 에도 막부 하에서 장기간 평화가 유지되면서 칼은 자연스럽게 그 실용성을 잃어갔지만 여전히 무사들은 칼을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기거나 미적 취향을 반영하면서 장식적인 용도로 사용됐다.

칼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장인들은 가문 대대로 공예술을 계승해갔고, 뛰어난 제자를 자기 가문의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전통을 이어나갔다. 칼집, 손잡이 등 날을 제외한 부분에는 미적 취향이나 가문의 상징이 되는 대상을 형상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금속공예술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특히 칼날로부터 손을 보호하기 위해 칼날과 손잡이 사이에 끼워진 츠바(Tsuba)에는 용, 호랑이, 식물, 신화 속 장면 등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장식들이 발달하게 된다.
보통 한 장인이 잘 표현하는 대상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츠바의 외형만으로도 공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에도 이후부터 칼이 무기로서의 성격 대신 신분과 재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장인들은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메이지 정권이 들어선 후 폐도령이 내려지면서 칼의 휴대가 불가능해졌다. 이는 칼을 제작하는 장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폐도령이 칼의 소재를 제한하는 것은 아니지만 휴대를 금지시킴으로써 아직 남아있는 구체제의 신분질서를 철저히 붕괴시켜 표면적으로라도 평등사회를 구축하려 했던 의도였다. 따라서 더이상 과시적인 장식성이 필요없게 된 것이다.
폐도령으로 인해 한 순간에 실직자들로 전락할 뻔했던 장인들을 구한 것은 '자포니즘'이었다. 에도 막부 말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일본 생활품들이 소개된 이후 19세기 유럽에는 일본풍 미술에 대한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다. 이에 메이지정부는 자국 내에서 각종 공예대회를 열었고 수상한 장인들에게 높은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면서 공예미술의 발전을 도모했다. 이로 인해 수준급의 공예품들이 만들어졌고, 금속 공예가 메이지 정부의 중요 산업의 급부상하기도 했다. 주로 향로나 벼루집, 실내 인테리어 장식품 등 크게 실용적인 기능이 없고, 예술적 특성이 강한 상품들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됐다.
이들은 주로 일본신화나 불교에 등장하는 도상들, 혹은 동식물 등을 그려넣은 작품들이었다. 신도(神道)나 불교 모티프는 일본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니기 때문에 특히 유럽 콜렉터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였다. 곤충과 식물 등이 자주 등장한 것은 에도 말기부터 유행한 박물학과 관련되어 있다. 에도 막부 시기 산킨코타이(참근교대제)가 실시되면서 여행문화가 형성됐고 이와 함께 전국 각지에 분포한 곤충 및 식물들에 대한 채집 및 연구가 성행했다. 메이지 공예품들에 등장하는 곤충이나 꽃에 대한 섬세한 묘사는 바로 박물학 발전의 연장선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비슷한 주제들의 작품들이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면서 새로움을 더하지 못했고 이는 곧 산업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 시기의 뛰어난 공예품들은 미술품 수집가 나세르 갈릴리(Nasser D. Khalili)의 갈릴리 컬렉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픽사베이]

